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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세이야] Ultima Thule

머나먼 북쪽, 세상의 끝에서


 

눈이 시리도록 검푸른 바다 위에 네모난 얼음조각이 떼를 지어 떠다닌다. 하늘하늘한 초록 베일을 걸친 하늘 아래 하얗게 솟아오른 산맥과 파르라니 펼쳐진 설원은 발을 내딛기가 꺼려질 정도로 청량하다. 때때로 들려오는 새의 울음소리나 유빙이 부딪치는 소리, 먼발치에서 힐끔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짐승 몇몇이 전부인 광활한 세계 속에서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엣취!” 

긴긴 겨울이 간신히 말미에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영하 수십 도는 우습게 넘나드는 계절이다. 게다가 여름이 찾아와도 맨땅이 드러날 일이 거의 없는 지역인지라 재킷 하나 없이 돌아다니다간 동사하기 딱 좋은 환경이지만 티셔츠와 바지 차림인 미로는 재채기 끝에 코를 한 번 쓱 문지를 뿐이었다. 가혹한 훈련과 제7감에 다다른 소우주 덕도 있지만 지중해에서 태어나 지중해에서 수행한 성투사치고는 퍽 추위에 강한 편이다. 친구와 선배 덕이리라.

미로는 피식 웃으며 왼손의 짐덩이를 재차 움켜쥐었다. 전신의 상처에서 배어나온 지방과 핏물이 치덕거리며 얼어가고 있었다. 상할 걱정은 없어 고맙지만 딱딱하게 굳어버리면 해체하기 귀찮다. 그러나 이 장소에서 처리하는 것도 곤란했다. 자루도 뭣도 없으니 운반이 거추장스럽고, 피냄새를 맡은 짐승들이 접근할 가능성도 있다. 북극곰이나 북극여우 몇 마리가 따라온들 크게 문제되지는 않지만 빼앗기는 부분은 틀림없이 생긴다. 무엇보다 바다표범의 해체는 손에 익지 않은 작업이었다.

“아프로디테, 있을까.”

장엄하게 일렁이는 오로라 보레알리스를 머리에 이고 짐짓 소리 내어 중얼거려 본다. 아프로디테의 수행지는 아직 까마득하게 멀지만 광속의 주먹을 가지고 있는 황금성투사가 마음만 먹으면 동네 산책하듯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미로는 자신과 비슷한 덩치의 바다표범을 질질 끌면서 묵묵히 걸었다. 또래의 아이가 걷는 것과 동일한 속도로 눈과 얼음을 꾹꾹 밟으면서. 그린란드에 도착한 후 만신창이로 공중제비를 도는 바다표범을 낚아챌 때까지의 질풍 같은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아프로디테, 있을까.”

한 번 더 중얼거린다. 미로가 아프로디테의 수행지 그린란드까지 찾아온 적은 몇 차례 되지 않지만 찾아와서 만난 것은 그보다 더욱 적었다. 특히 작년부터는 취미생활이다 뭐다 하면서 수행지에 머무르는 시간이 한층 줄었다. 기점과 종점은 알지만 경로를 모르기 때문에 붙잡기가 여의치 않다. 소우주 추적결과도 신통찮아 쌍어궁에서 죽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피차 불규칙적인 나날을 보내는 터라 시간이 날 때 방문할 수 밖에 없었다.

“연락은 받지 않고…….”

걸음이 느려졌다. 한숨을 쉰 미로는 비딱하게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발자국을 완전히 덮어버린, 군데군데 불그스름한 얼룩이 남은 긴 자취가 광대한 설원을 어지럽게 가로지른다. 미로는 누구처럼 길치가 아니다. 똑바로 이어지다가 빙 우회하다고, 다시 바른 길로 돌아갔다가 또 옆으로 빠지고, 이리저리 비틀기를 반복한 궤도는 미로의 망설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5년 전, 지상에 여신이 강림했다. 환호와 흥분, 긴장이 뒤섞이는 와중에 사가가 사라지고 아이오로스가 반역했다. 1년 후 말도 없이 쟈미르로 떠난 무우는 지금껏 귀환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임무를 받기 시작한 연중조와 접점이 뜸해지고, 각자의 수행지로 흩어진 연소조끼리도 어쩐지 멀어지는 듯해 산타클로스 탐색을 빌미로 소동을 벌인 것도 이미 2년 전이다. 작년에는 샤카와 아이오리아가 대충돌을 일으켜 콜로세움을 반 토막 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오리아의 우울증은 다소 나아졌다. 그렇지만 이렇다 할 사건이 없는 연중조와의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은 채다.

만나지 않으면 진전이 없다. 허나 만날 수 없다. 엇갈리는 일정은 좀처럼 겹치지 않는다. 우연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쳐들어가도 빈집만이 맞이해 준다. 근성을 태우며 계속 도전하고는 있지만 점차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말이지!”

퍽 하고 얼음덩어리를 분쇄하며 멈춰 선 미로는 동동 발을 굴렀다.

“어디에 있어, 아프로디테!”

육성과 텔레파시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그린란드까지 만나러 왔다고! 올 들어 벌써 세 번째야! 이번에 만나면 극야에서 헤맸던 것까지 전부 쳐서 배로 되갚아 줄 테다!”

원래 미로는 오래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다. 있는 힘껏 소리치며, 보낼 수 있는 모든 주파수로 텔레파시를 퍼트린다. 목덜미를 움켜쥔 바다표범을 허공에서 윙윙 돌려가며 한 걸음씩 와직와직 설원을 짓밟고, 그 때마다 대지가 격한 진동과 함께 갈라졌다. 목소리만큼 소우주도 높아져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크레바스의 가장자리가 서서히 녹아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악을 쓰며 걷던 미로의 횡포가 중단된 것은 거대한 빙벽이 앞을 가로막았을 때였다. 칼로 썰어낸 듯 매끈한 단면을 드러낸 빙벽은 양옆으로 수 Km 쯤 늘어서 있다. 높이는 들쑥날쑥하지만 대략 0.1km 정도. 상하좌우에 걸쳐 빙벽을 훑어본 미로는 바다표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오른손을 들었다. 서서히 소우주가 높아지며 손가락 끝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스칼렛 니…….”

“정도껏 하지 못하겠냐!”

“그엑!”

정수리에 날카로운 아픔이 퍼졌다.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바다표범조차 놓치고 벌렁 뒤로 넘어진 미로는 맨살을 물어뜯는 서릿발에 다시 벌떡 일어났다. 머리 위에서는 가느다란 피보라가 솟구치고 있었다. 눈가에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훔치며 정수리에 꽂힌 흉기를 뽑은 미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악했다.

“하필이면 피라니안 로즈? 내 머리를 두 조각낼 심산이었어?”

“됐으니까 빨리 소우주나 지워!”

빙벽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아프로디테는 막 아우성치려던 미로의 뒤통수를 잡아 빙벽에 처박았다. 빈틈없이 밀착한 빙벽과 얼굴 사이에서 짜부라진 비명이 새어나왔지만 아프로디테의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입에 닿은 얼음을 갈근갈근 갈아 봐도 빙벽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돕기만 할 뿐이다. 결국 백기를 내건 미로는 뾰족하게 확산되던 소우주의 잔재가 주변 공기와 완전히 융화되었을 무렵에야 해방되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다짜고짜 무슨 짓이야. 차갑잖아.”

입안을 가득 채운 얼음조각을 뱉어낸 미로는 벌겋게 언 얼굴을 문지르며 불평했다. 아프로디테가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이 상황에서 빙벽 넘기 귀찮다고 터널을 만들려고 하다니, 너 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

“응?”

“네가 장소고 뭐고 가리지 않고 초음파에 초고주파에 초저주파에 지진 수준의 진동까지 일으키며 깽판을 부리니까 북극해에서 대치 중이던 미군과 소련군의 핵잠수함이 임전태세에 들어갔단 말이다! 북부의 미공군기지에서는 출격준비까지 하고 있다고! 기상 상태가 이래서 실제 날아오르진 않겠지만!”

말을 끝마친 기세 그대로 빙벽을 후려갈기자 큼직한 크레이터가 패였다. 아프로디테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외관이 외관인지라 일단 화가 나면 평소와의 괴리감까지 더해져 보통 박력이 아니다. 소우주 연소를 자제하고 있는데도 등 뒤에 거대한 불길이 보일 정도였다. 미로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갸울였다.

“그거 위험해?”

“미로 너, 제3차 세계대전의 원흉이 되고 싶냐?”

미로는 눈을 끔벅이다가 입을 떡 벌렸다. 아프로디테는 부스스하게 뜬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탄식했다. 겨우 상황파악이 된 모양이다. 세계 각지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어언 40여 년에 달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계기로 전쟁이 터질지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아프로디테는 감각을 예리하게 갈아 먼 바다 쪽을 살폈다. 불온한 분위기는 여전하지만 별다른 움직임도 폭음도 없다. 다소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마침 유달리 강한 태양풍이 적절한 구실이 되어 줄 것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 했다.

“굉장하다. 이런 뜻이었구나.”

그러나 미로의 이해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아프로디테가 의뭉스럽게 쳐다보자 미로가 신나게 설명했다.

“내가 그린란드에 가도 아프로디테를 만날 수 없다고 푸념하니까 대자연에 호소하면 아프로디테가 나올 거라고 했거든.”

“누가?”

“교황님이.”

호소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기나 하는지 염려하는 동시에 모 게자리라든지 모 염소자리를 떠올리고 있던 아프로디테는 의외의 이름에 흠칫 경직되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프로디테?”

반응이 없었다. 대답도 없고 미동도 하지 않아 마치 살아있는 조각상이 된 것 같았다. 이상히 여긴 미로가 한 발짝 다가오며 다시 한 번 불렀을 때였다. 크레이터에 댄 채였던 아프로디테의 주먹에서 설핏 빛이 나는가 싶더니 빙벽에 거대한 균열이 졌다. 놀란 미로의 눈앞에서 균열은 하나에 그치지 않고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무음인 것이 오히려 무섭다. 아프로디테의 소우주가 급격하게 높아지고, 세세하게 들어간 균열은 빙벽 전체로 퍼질 기세였다. 자칫하면 완전 붕괴다.

“아프로디테, 진정해! 뭔지는 모르겠지만 세계대전이!”

미로의 소리가 멀다. 아프로디테의 머릿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교황, 그것이 흰 쪽이라면 몇 번이나 허탕을 치는 미로가 안쓰러워 조언을 해 주었을 수도 있다. 교황, 그것이 검은 쪽이라면 쌍방의 대참사나 나아가 전쟁이 일어나도 좋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지상을 지킨다는 명분은 인간끼리의 싸움엔 적용되지 않는다. 근래 왕성했던 태양의 활동을 놓쳤을 리 없다. 과연 어느 쪽일까.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무슨 목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는 귓전에 대고 소리치는 미로의 입을 막는 김에 가볍게 떠밀었다. 그의 생각이 무엇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결정은 예전에 내렸다. 지금은 자신이 일으킬 지도 모르는 대참사를 막는 것이 먼저다. 천천히 빙벽에서 손을 뗀 아프로디테는 깊숙이 심호흡을 했다. 달아올랐던 폐 안의 공기가 차갑게 냉각된다.

“귀 안 먹었다.”

아프로디테는 몸을 바로 세우고 빙벽에서 멀어졌다. 뒤따라온 미로는 못내 석연찮았지만 금세 표정을 고치고 빙벽을 뒤돌아보았다.

“저건 어떻게 해?”

“이대로 두면 무너질 테니 적당히 물이라도 뿌려두자.”

“오래 못 버틸 텐데.”

“응급처치만 하면 돼. 나중에 자연스럽게 무너질 테니까. 근데 넌 무슨 용무야? 임무로 온 건 아닐 테고.”

“아 참.”

미로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장미가 꽂힌 충격으로 손을 놔버린 바다표범은 빙벽 옆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 사이 엷게 쌓인 얼음가루로 곱게 포장된 상태였다. 한달음에 바다표범을 집어온 미로는 그걸 아프로디테에게 내밀었다.

“이거 줄게.”

“바다표범?”

“보통 바다표범이 아니라고? 이거, 범고래가 사냥한 바다표범이야!”

“범고래가?”

“저글링하는 걸 날치기했어. 육질이 연해졌을 테니까 맛있을 거야.”

“자랑스럽게 말하지 마. 이런 벼룩의 간을 빼먹을 녀석 같으니.”

“별로 거저 얻은 건 아냐. 범고래가 사냥하길 반나절 기다렸다고. 한 마리 먹은 후에 가지고 노는 걸 가져왔으니까 괜찮잖아.”

가슴을 편 미로는 뚱한 얼굴로 반론했다. 지나가다 주운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렀다는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군데군데 가죽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난 바다표범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얗게 얼어가는 바다표범의 꼬리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완전히 물어뜯긴 것이 아니라 자국만 남았다는 사실이 미로의 말을 증명한다. 미로는 바다표범을 내민 채 투덜거렸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깜빡 했으니까 올해 3회분으로 하려고 있지만 두 번은 실패했으니 어쩔 수 없지 뭐. 대신 육포 만들면 천갈궁에도 나눠줘.”

“어느 새 머리를 굴리게 되었다만, 대신이라는 말이 들어갈 자리냐?”

미로는 면박에도 기죽지 않고 웃었다. 사가는 사라졌다. 아이오로스는 숙청되었다. 연중조는 멀어지고, 연소조끼리의 교류도 줄어 자연히 소원해지는 경향이다. 황금성투사 12명이 모두 모인 것을 축하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현재의 성역은 그 때와 너무도 다른 공기를 휘감고 있다. 지금도 아프로디테는 중요한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미로는 지금 해야 하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생일 축하해,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는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각각의 하루를 챙기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그저 멀리 떨어진 곳에 스스로를 두는 것으로 만족한 3월 10일이 벌써 수년째였다. 아프로디테는 코앞에서 대롱거리는 바다표범을 엉겁결에 받아들면서 그만 웃고 말았다. 울티마 툴, 신화적 세계의 끝에서 피로 물든 바다표범과 거칠게 갈라진 설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빙벽과 전쟁의 위기, 흑막의 노림수 혹은 배려와 후배의 포기하지 않는 끈기로 맞이한 14번째 생일은 뜻밖에도 유쾌했다.


by 벽효-아리수 | 2011/03/10 21:02 | ├ 황금보완계획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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