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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세이야] 대화를 합시다? <上>

부활하고 나서 다음, 다음, 다음~

 1. 평화주의자


“좋아하지 않아.”

일견 미모의 여성으로 보이는 물빛 머리칼의 청년이 엷은 다갈색 액체를 따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일견 청순가련한 소녀와도 같은 연둣빛 머리칼의 소년이 맑은 보라색 액체를 휘저으며 무덤덤하게 응수했다.

“마뜩찮은 얼굴이군.”

“믿지 않으니까요.”

“그러한 방식의 부정은 양날의 칼이지만.”

아프로디테는 우아하게 술잔을 들어올렸다. 달그락 얼음이 부딪친다. 출렁이는 액체에 비친 눈동자가 완만하게 누그러졌다. 반대로 슌의 눈매는 한층 단단해졌다.

“무엇을 웃고 있습니까?”

“웃고 있는 편이 좋지 않아? 비폭력 노선의 대화 해결을 중요시하는 상대에겐.”

“비꼬고 있나요?”

“어디가? 믿을 만한 증언에 근거해서 도출한 대처방안이었는데, 잘못 해석했나?”

대화를 청하지 않았던 유일한 적수의 말에 한동안 침묵을 지킨 슌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저었다.

“따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세이렌과 스킬라.”

“해투사입니까!”

컵을 잡은 손에 언뜻 힘줄이 돋아났다. 청동성투사나 백은성투사 정도일까 하는 예상을 까마득히 초월한 출처였다. 아프로디테는 짐짓 갸웃갸웃해 보였다.

“내가 해계 담당이 되었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물론 듣기야 했지만 그렇게 친한 줄은 미처 몰랐네요.”

“공통의 화제를 찾다 보니 네가 나왔을 뿐이야. 외교는 딱딱한 이야기만으론 이루어지지 않거든.”

슌은 잠자코 컵에서 빨대를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그리곤 단숨에 컵의 내용물을 들이켰다. 계속 휘젓고 있던 탓인지 탄산가스가 깨끗하게 빠져나간 포도주스는 걸리는 일도 없이 잘도 넘어갔다. 아프로디테도 한 모금 잔을 비웠다.

“그럼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갈까.”

아프로디테는 슌이 컵을 내려놓는 것을 가늠해 화제를 되돌렸다.

“싸움 따윈 좋아하지 않아. 물론 폭력도, 유혈도, 살인도.”

새롭게 주스를 부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슌은 천천히 병을 내려놓았다.

“억압하는 것은 좋아하지요? 힘은 정의가 아니었습니까?”

의념을 품은 진지한 눈빛이 아프로디테를 쏘아 맞혔다. 슌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아프로디테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정의다.”

“그렇다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우리는 피에 젖은 쾌락살인마 따위는 아니야. 확고한 적과 대의를 가진 전사다.”

“적어도 통곡의 벽 앞에서는 그랬지요.”

“적은 철두철미하게 쓰러트린다. 위협의 싹은 일찌감치 자르고 뿌리를 뽑는다. 대적하는 자는 두 번 다시 도전해 올 생각이 들지 않도록 재기불능으로 만든다. 섬멸해도 좋아. 우리의 싸움은 정치나 외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쟁과는 다르니까.”

“당신의 적은 가짜 교황을 따르지 않는 성투사였을 텐…….”

가시 돋친 소리로 반문하던 슌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힌다. 아프로디테는 잠깐 쓴웃음을 지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성역은 인간으로서 강림하는 여신을 지키는 장소, 인간이 만들고 유지하는 조직이다. 때문에 신이 없을 때에도 항상 지상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명투사와 해투사는 다르다. 자신들의 세계라면 어쨌든 이 지상에서 명투사와 해투사로서 존재하기 위해선 신의 강림이 필수적이다. 거꾸로 누구 하나 없어도 신이 있으면 거기서부터 다시 성립될 수 있는 군대야. 그러나 성역은 언제나 누군가가 관리해야 하는 집단이다. 인간사의 축소판이지.”

“그것이 무력한 아기를 배제하고 인정사정없는 숙청을 정당화하는 명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까? 인간은 원래 골육상잔을 벌이는 잔학한 동물이라고?”

“부활과 계승의 차이를 말한 거다. 생각해 봐라,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것을 구태여 두 번 세 번 반복해 기력을 탕진할 필요가 있을까? 단순히 피해를 입히거나 그것을 빌미로 제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무익한 소모전이다. 명왕이나 해황은 확실히 그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었지. 성역과 성투사가 완전히 짓밟힌다면 여신은 다시 강림조차 할 수 없을 터. 달리 말하면 이쪽이 무서울 정도로 끈질겼다는 말도 되지만.”

“당신은 지금의 평화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승리한 여신은 삼계의 공존을 바랐다. 패자의 전멸은커녕 전면적인 부활을 통해서까지.

“그럴 리가. 지금의 여신은 확고한 정의다.”

아프로디테는 담담하게 단언했다. 슌은 못마땅하다는 듯 이맛살을 찡그렸다.

“당신과는 말이 통하질 않는군요. 말하는 내용도 뒤죽박죽이고.”

“그래?”

“나는 당신의 의견을 물었지 성전이나 성투사의 일반론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만.”

아프로디테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주위로 붉은 장미꽃잎의 흐름이 불현듯 나타났다 사그라졌다.

“어쨌거나 싸움은 좋아하지 않아. 다만 피할 수 없을 때가 있고, 한다면 철저히 때려눕힐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싫습니다.”

“그거야 네 마음이지만 충고 한 가지 해 두지, 안드로메다. 대화로 해결하고 싶다면 상황을 판별해라. 상대의 의사를 무시한 일방적인 요구는 대화가 아니라 선전포고다. 이건 세이렌의 전언이기도 해.”

반응이 나오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렸다. 잠시 굳어졌던 슌의 얼굴은 다음 순간 확 달아올랐다.

“정말 거침없이 말하는군요. 역시 비꼬고 있는 것 아닙니까!”

“너도 그렇잖아?”

아프로디테는 정말로 즐거운 듯이 파안했다.

“덤으로 얻은 생이다. 이전에도 후회는 하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그 때 하지 못했던 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아테나의 허락도 있고.”

슌은 입을 꽉 다물었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얼굴이 된 소년을 앞에 두고 아프로디테는 손안의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강렬한 위스키 향기가 잔잔히 퍼져 나왔다. 문득 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맞추듯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기류가 탁 풀어지고, 다양한 소음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프로디테는 주변의 소란에 섞여 엷게 희석되어 가는 향을 음미하며 심술궂게 말을 꺼냈다.

“그래, 내가 되살아나서 처음으로 불평한 대상을 가르쳐줄까?”

“알고 싶지 않습니다.”

슌은 이번에야말로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가라앉아 가던 기류가 조금 꿈틀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아프로디테는 유쾌하게 웃었을 때, 뒤쪽에서 커다란 폭음이 일었다. 슌이 거기에 일순 정신을 빼앗긴 사이 아프로디테가 술잔을 기울이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평화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2. 감상주의자


세이야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올려보았다.

“넌 알아주겠지? 세이야!”

“아, 뭐, 저기, 그게…….”

“알, 아, 주, 겠, 지?!”

“네, 넷!”

붙들린 양어깨의 뼈가 삐걱삐걱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세이야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절박함도 진짜로 울고 있는 사가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너라면 알아줄 거라 믿었다! 이 세상에 단 둘 뿐인 형제가 강제로 생이별을 해야 하는 이 비극을!”

테이블 너머에서 팔을 뻗어 자신의 반 이하 밖에 살지 않은 소년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부여잡은 사가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옛날부터 카논은 날 닮아 정말로 귀여운 아이였으니까, 나의 그림자로 사는 인생이 아니었으면 벌써 옛날에 납치되어 고가로 팔려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실제 고아원 시절엔 유괴 비슷한 일도 일어났었고. 물론 진짜 목표는 나였지만! 그 시절 본의 아니게 헤어져버렸을 때에도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데 어째서 또! 우리는 본래 하나인 존재였다. 나에게 매달려 있던 카논의 손이 강제로 떨어져 나갔던 순간 마치 토막토막 잘려 저울대에 오른 정육점의 고깃덩이가 된 기분이었어. 알아주겠지, 세이야? 그 슬픔과 고통을!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그 괴로움만은 잊을 수가 없어! 결국 돌고 돌아 성역에서 재회했을 땐 얼마나 기뻤는지! 그것이 어언 20년 전의 일인가. 그런데 다시 만난 카논은 어느 새 악에 물들어…….”

넋두리는 끝없이 계속되었다. 카논이 맞고 삐졌던 일, 카논이 말대답했던 일, 카논이 밥상도 차려놓지 않고 놀고 있었던 일, 카논이 화장실 휴지를 다 쓰고 나왔던 일 등등을 토로하는 모양새가 잘못하면 태내에서 영양분을 빼앗았다고까지 몰아붙일 기세였다. 몇 번인가 말을 끊으려 해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주변의 소리는 한 귀로 들어가 한 귀로 흐르는 것 같았다.

“사가, 이런 성격이었던가.”

오른쪽에서 기막힌 듯 중얼거린 이는 미로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쌓인 게 많아 그런 거겠지.”

왼쪽에서 달래듯 이야기한 이는 알데바란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 지금 당장 같이 도망쳐줘…….”

미로의 왼팔에 팔짱을 끼고 알데바란의 오른쪽 옆구리자락을 움켜쥔 세이야가 스러질 듯한 목소리로 부탁하자 양옆에서 동일한 대답이 돌아왔다.

“미안, 절대 무리.”

“미안하다. 무리야.”

세이야의 머리가 푹 꺾어졌다.

“대신 같이 있을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 세이야.”

“카논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도 흔치 않고.”

“바꿔 말하면 사가의 옛이야기이기도 하지. 우리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어.”

“어쩐지 인격이 의심되는 자기자랑으로도 들리지만. 뭐, 그런 건 이제 와선가?”

“미로, 그건 좀 과언인데.”

“사가가 술 먹고 울며 주정하는 것도 희귀한 구경거리야. 누구 더 불러올까? 방패막이라면 무우나 카뮤가 좋겠군.”

원래부터 이야기 상대였던 알데바란과 카논의 화제에 관심을 보였다가 덜컥 붙잡힌 미로의 말은 각각 방향성은 다를지언정 매우 따뜻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세이야는 체념한 듯이 고개를 들었다. 단지 그 시선은 바로 앞에서 무한한 낙루와 푸념을 쏟아내고 있는 얼굴을 미묘하게 비켜가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카논은? 오늘 안 와?”

세이야는 사가가 지나가는 잡병을 붙들고 새로운 술과 안주를 요구하는 동안 소리를 낮춰 민첩하게 물었다. 알데바란과 미로는 잠시 얼굴을 마주 보았다가 세이야의 귀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초대장은 보냈지만 온다는 연락은 못 받았어.”

“오지 않는다는 연락도 딱히 없었지만 부활 이후 성역엔 한 번도 오지 않았으니까 가능성은 낮지.”

그 때 주문을 마친 사가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세이야, 알아주겠지! 생사도 몰랐을 무렵엔 막연한 희망과 절망으로 언제나 가슴이 찢어지고 있었지만 행방을 알고 있어도 만날 수 없는 이 상황이 얼마나 기가 막힌 것인지! 산을 부수고 강을 메우고 은하를 깨뜨리고 신을 넘어뜨려 이 형의 애정을 보여주지 않으면…….”

즉, 다시 세이야의 어깨를 잡고 하소연을 시작한 것이다. 점점 발언들이 위험해지고 있었다. 말하는 중간중간 체외로 배출되는 수분을 보충하듯 쉴 새 없이 술을 들이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광속이다. 아이의 교육에 좋지 않은 풍경이므로 알데바란과 미로 역시 광속으로 빈 술병을 재깍재깍 치워나갔다. 다행히 세이야는 돌연 나타났다 사라지는 술병들엔 애당초 관심이 없었고, 지금은 양쪽에서 띄엄띄엄 전해지는 귓속말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해계와의 연락망은 유지하고 있지만 사적으로 쓸 수는 없어서 말이야.”

“일단 본인이 의사표명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다 여신과 해황 사이도 이야기가 끝나 있어서 섣불리 끼어들 문제도 아니고.”

“저쪽에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카논이 성역에 오기를 빌 수 밖에 없는 상황이야.”

“현재로선 해계 담당인 아프로디테가 제일 접촉이 많은 편이지만 공적인 발언 이외엔 이렇다 할 얘기는 전해주지 않거든. 사가도 애가 타겠지.”

말하는 김에 아프로디테가 앉아 있던 자리를 곁눈질한 미로는 흠칫 경직되었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못 본 척이다. 낌새를 알아차린 알데바란이 얼핏 시선을 던지자 눈짓으로 뱅글뱅글 돌아가는 분홍빛 기류를 가리킨다. 그 자리에 누가 있는지를 잠깐 생각하던 알데바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띄웠지만 자기 코가 석자였다. 한편 세이야는 세이야대로 낙담하고 있었다.

“복잡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결국 카논과 만날 수 없다는 거지?”

사가의 팔이 움찔 떨렸다. 천천히 떨어져 나가는 사가의 손을 멀거니 지켜보자니 미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세이야, 그렇게 카논이 신경쓰여?”

“그야, 뭐, 명계에서 신세진 것도 있으니까. 그 이후로 만나지도 못했고.”

“해계에서 그렇게 고생했으면서?”

미로의 목소리는 경쾌했지만 가볍지는 않았다. 알데바란은 무언이다. 세이야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알데바란을 잡은 손을 놓고 쑥스러운 듯 콧잔등을 긁었다.

“그거, 사가한테도 말했지만 나 해저신전에서 카논을 본 건 포세이돈의 삼지창에서 사오리씨를 지켰을 때가 처음이라서. 나중에 대홍수의 원흉이라고 들어도 어쩐지 실감이 잘 안 오더라고.”

“그러니까, 인상이 두루뭉술한 참에 위험한 순간 아군으로 쨘 나타난 것만 뚜렷하게 각인되어서 호감도가 대폭 올랐다?”

“웅, 그런 걸까?”

“단순한 녀석이로세.”

미로는 오른 손가락으로 세이야의 이마를 탁 퉁기며 웃었다. 구김살 없이 밝고 명랑한 웃음이었다.

“어차피 난 바보야.”

“어럽쇼? 생각보다 냉정하네?”

“하도 많이 듣는 말이라서.”

샐쭉하니 토라진 세이야의 머리를 알데바란이 호쾌하게 쓰다듬었다. 머리가 엉망이 되었지만 세이야의 표정은 반대로 느슨해졌다.

“칭찬이야, 세이야.”

“그래. 단순하기로는 나도 뒤지지 않으니까!”

“미로, 그거 자랑이야?”

“별로 수치도 아닌 걸? 거기에 카논을 인정한 건 내가 제일 처음이고.”

미로가 웃었다. 알데바란이 웃었다. 세이야가 웃었다. 마음 편한 웃음소리가 어우러지는 훈훈한 공간에 눅눅한 흐느낌이 끼어든 것은 정말 돌연이었다.

“세이야, 네가 우리 못난 동생을 그렇게 잘 봐주다니…… 나는, 나는…….”

3명은 깜짝 놀랐다. 팔이 떨어진 탓에 방심, 아니 존재를 잊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가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숫제 폭포였다. 뜨거운 눈물비가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져 미로와 알데바란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동안 늘어놓은 술병들 사이로 내를 이룰 지경이다. 감정의 고조에 따라 소우주도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더 이상은 정말로 위험하다고 판단한 미로와 알데바란이 세이야를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사가의 격정적인 통곡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머리 위에서 거대한 폭음이 일며 무언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3. 낙천주의자


샤카가 오른발을 내딛자 아이오리아도 오른발을 내딛었다. 아이오리아의 오른손이 주먹을 만들자 샤카가 왼손을 들어올렸다. 샤카의 오른손이 주먹을 쥐자 아이오리아가 왼손을 쫙 폈다. 대치하는 각각의 주먹과 손바닥 사이에서 화려하게 스파크가 튀었다.

“비켜, 아이오리아.”

샤카의 이마에 핏대가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지. 형님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

아이오리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말대로 떠억 버티고 선 아이오리아 뒤쪽의 테이블에서는 화기애애한 환담이 오가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 데스. 지금 몇 살이지? 어디, 아이오리아가 스무살이 되었다고 했으니 스물하고 셋인가? 그래도 아직 나보다는 작네. 이렇게 끌어들이면 대충 팔 안에 들어오니까. 어쩐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서 기쁜데.”

“그러게."

“사가도 그 때하고 별로 다르지 않고 말이야. 그렇지만 주름살이라든가, 좀 늙은 느낌이 나긴 하더라. 감정은 훨씬 풍부해진 것 같다만. 슈라는 어쩐지 알 거 모를 거 다 알아버린 위험한 어른 분위기가 나고, 카뮤는 제자를 둘이나 키웠다지?”

“그러게."

“아프로디테는 원래 겉보기와 전혀 다르게 가차 없는 아이였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한층 굉장해졌더군. 나한테 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진짜 좀 오금이 저렸어. 아니, 그 다음 표적은 나였으니까 어차피 마찬가지였나. 너희들 용케도 그 독설을 듣고 살았구나.”

“그러게."

“데스는 또 데스마스크가 되어 있고.”

“그러게.”

“데스, 대답에 성의가 없다?”

아이오로스가 웃는 낯으로 데스마스크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스윽 올렸다. 건성으로 대응하던 데스마스크는 본능의 경고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아이오로스가 훨씬 기민했다. 순식간에 데스마스크의 머리를 휘감은 아이오로스는 그대로 테이블 밑으로 끌어내려 옆구리에 끼고 꽉꽉 조였다. 처음에는 잠잠했지만 아이오로스가 다른 팔을 활용하여 더욱 비틀자 식탁보 아래에서 비명이 새어나왔다.

“아파! 아프다고, 아이오로스!”

“과연 머리가 확실히 커졌군. 튼튼하고. 이 정도면 부러지거나 부서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는걸.”

“아이오로스!”

“그동안 단련을 게을리 했나 보다? 아무리 특수능력계라고 해도 몸은 기본자산이니까 하루라도 쉬면 안 된다고 얘기했지. 샤카한테는 꼬박꼬박 시키면서 저는 농땡이피우는 버릇, 여적 안 고쳤냐? 자고로 연장자가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란다?”

아이오로스가 팔을 요리조리 돌릴 때마다 데스마스크의 목과 옆구리가 기묘하게 구부러지며 아드득아드득 위험한 효과음을 냈다. 비명에 절규가 섞였다.

“댁은 너무 지나쳐! 어째서 14살짜리가 나보다 덩치도 크고 힘까지 센 거야?”

“그거야 모를 일이지만, 혹시 유전적 정보의 차이라든지?”

“웃기지마! 그럼 아이오리아는 어떻게 설명할 건대! 추억 속에서 미화된 거라고 여겼는데 뭐야 그 체격! 이건 사기야! 명계에서 자는 척하고 몰래 근력 트레이닝 하고 있었던 거 아냐, 이 근육광 스파르타 매니아!!”

“말이 심하군. 내가 죽었을 때 황천비량판까지 배웅을 나와 주었던 그 상냥하고 어른스러운 데스는 어디로 가 버렸을까.”

“과거의 환상이야! 옛날에 죽었으니까 잊어버려!”

“명계에선 만나지 못했는데.”

상큼하게 데스마스크의 항의를 씹은 아이오로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 들릴 듯 말 듯 음량으로 흘러나온 그 단어에 아이오로스의 팔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던 데스마스크의 움직임이 뚝 그쳤다. 언짢은 목소리가 식탁보 아래에서 빠져나온 것은 한참 후였다. 

“쓸데없는 걸 기억하고 있잖아, 이 노인네가.”

“몸은 너보다 젊어.”

“노사와 교황에게 말 트고 오면 후배로서 혹사해 주지, 조로병 추정환자!”

“정말 귀엽지 않게 컸잖아. 입도 험하고 눈초리도 나빠졌고.”

아이오로스가 의미심장하게 이두박근을 부풀렸을 때였다.

“형님.”

아이오리아가 긴박하게 불렀다. 동생 쪽을 흘깃 쳐다본 아이오로스는 가볍게 파이팅을 날려주고 데스마스크의 등에 한 손을 두었다.

“과다노동 탓인가? 발육불량도 사가가 밥을 제대로 먹이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야? 슈라나 아프로디테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그렇고, 사가에게 책임을 물어야겠지, 역시.”

“……목매다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 모양이군.”

“사가가 목 한 두 번 맨다고 해서 죽겠냐? 목의 근육이나 연골을 단련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세이야의 페가수스 유성권, 혜성권, 롤링크래쉬 풀코스에 잇키의 봉익천상을 연달아 맞고도 이렇다 할 타격을 입지 않은 사가의 사인은 자신의 손에 의한 심장관통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데스마스크가 묵비를 행사하는 사이 아이오리아가 다시 절박하게 외쳤다.

“형님!”

“힘내라, 아이오리아.”

이번엔 시선도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태는 그런 말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고조되어 있었다. 파직파직 전후좌우로 튀는 소우주의 파편 너머로 샤카의 머리카락이 곤두설 기미를 보이자 숨을 크게 들이마신 아이오리아가 단호하게 고했다.

“형님, 이제 한계입니다!”

그제야 데스마스크에게 걸고 있던 헤드록을 푼 아이오로스는 주변을 부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벌어지고 있는 샤카와 아이오리아의 천일전쟁 미만을 주시하며 흥미로운 듯 손가락을 꼽았다.

“확실히 샤카의 소우주가 심상치 않군. 아이오리아의 제어도 나쁘지 않지만 샤카는 압축률이 높다고 할까? 저 녀석들의 전적, 내 기억으론 특정조건이 걸린 경우를 포함해서 27전 9승 9패 9무였는데 지금은 어때?”

“지금도 엇비슷한 편이지만 예전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샤카가 눈을 뜰 것 같아요!”

“응? 그게 어쨌는데?”

부스스 상체를 일으킨 데스마스크의 설명은 조금 늦었다. 정황을 보고하는 아이오리아의 외침에 아이오로스가 멀뚱히 대답한 순간, 팽팽히 대치하던 균형이 작은 파열음과 함께 깨어졌다.

“아뿔싸아아아――――!”

그 한 마디를 공허한 메아리로 남겨놓고 아이오리아는 하늘의 별이 되었다. 중간에서 머물러 있던 힘의 덩어리를 아이오리아째로 치워버린 샤카는 그대로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뭔가가 뭉개지는 기괴한 소리는 무시다.

“샤카, 옆으로 차는 정도로 해 둬. 비품이라고.”

“방해야.”

데스마스크가 주의를 줘도 마이동풍이었다. 해방된 힘의 여파에 휩쓸려 맥없이 나동그라진 의자를 와자작 즈려밟은 샤카는 지금껏 아이오리아가 가로막고 있던 자리에 섰다. 데스마스크와 아이오로스의 테이블 앞이다. 눈꺼풀은 닫힌 채였지만 그 시선은 아이오로스에게 꽂혀 있었다. 꾹 다문 입 아래로 그림자가 지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부루퉁한 분위기였다. 지그시 샤카와 시선을 맞추던 아이오로스는 조금씩 실소를 흘리다가 끝내 폭소를 터트리며 두 팔을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획 방향을 바꾼 샤카는 아직 아이오로스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데스마스크의 뒷덜미를 잡아끌어 거리를 벌린 후 그 목에 팔을 돌리고 다른 손으로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경동맥을 찢거나 목을 꺾어버릴 수도 있는 자세였지만 데스마스크는 가볍게 한숨을 쉴 뿐, 뿌리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거기에 조금 표정이 풀어진 샤카가 아이오로스를 향해 단언했다.

“알고 있겠지만 아이오로스, 이건 데스다.”

“여전히 귀가 좋구나, 샤카. 그 눈은 언제부터?”

“10년 정도 전에.”

“안구에 문제는?”

“없어.”

“시각을 끊고 소우주를 비축해 순간의 폭발력을 높이는 건가. 재미있는 발상이군. 아이오리아한테도 시켜볼까?”

천연덕스럽게 화제를 돌린 아이오로스는 자신의 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되뇌었다.

“겨우 저런 걸로 동요해서 틈을 내보이다니 수행이 모자라.”

“아이오리아니까.”

“샤카, 그건 내 교육에 대한 비판일까?”

“엄밀히 말하면 당신이 가르치지 않은 시간이 더 길 텐데.”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만회해야지.”

아이오로스의 생기발랄한 미소가 섬뜩하게 빛났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선했다. 샤카가 머리 위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안 데스마스크는 내일부터 펼쳐질 지옥도의 피해자를 위해 고요히 명복을 빌었다.

“그나저나 완전히 술기운이 올랐잖아. 미성년자한테 술 먹인 건 대체 누구야?”

아이오로스 앞에 물컵을 가져다놓은 데스마스크가 지친 소리로 물었다. 아이오로스는 발그레하게 물든 얼굴을 탁탁 두드리며 답했다.

“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사가의 행방을 찾은 데스마스크는 무서운 속도로 빈병이 늘어나는 테이블에서 시선을 멈췄다. 언뜻 보기엔 건장한 어른 셋이 소년 하나를 짜부라트리고 있는 모양새지만 그 중 둘은 알데바란과 미로였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는 셈이다. 허나 그 술병들을 한 사람이 비우고 있다는 건 문제였다. 이미 사가가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가를 마시는 판이다.

데스마스크는 샤카를 매단 채 머리를 흔들며 장탄식을 내뱉었다.

“맨얼굴로 이야기할 용기가 안 났던 모양이지. 저 소심한 민폐쟁이.”

아이오로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하하하 웃었다.

“그래, 이야기를 하기는 했어?”

“그냥 여러 가지.”

“목메어 우는 건 상관없지만 목을 맬 것 같은 얘기는 가급적 자중해줘.”

“오늘은 서로 취했으니까 괜찮아. 지금은 또 카논으로 머리가 꽉 찬 것 같으니까.”

아이오로스는 조금 멋쩍은 듯 물컵을 희롱하며 너글너글하게 털어놓았다. 데스마스크는 그 낙관적인 견해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조금 떨어진 구석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모든 자초지종을 목격한 잇키는 허용범위를 아득하게 뛰어넘은 충격에 돌이 되어 있었다. 눈을 비비고 싶어도 손이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뜨고 싶어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별똥별이 되어 낙하해오는 아이오리아와 고스란히 충돌하고 말았다. 성대한 폭음이 일었다.




4. 주관주의자


냉기의 소용돌이가 잦아들고 대신 반투명한 직육면체의 얼음이 나타났다. 매끄러운 표면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결정이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불규칙적인 무늬가 사방으로 조밀하게 얽힌 아름다운 사각기둥이다.

“불합격.”

그러나 평가는 냉정했다. 스스로도 이건 아니다 싶은 표정이던 효가가 조금 발끈한다.

“그걸 왜 당신이 정하지?”

“보면 아니까.”

슈라는 불량품 판정을 내린 얼음에 검지를 갖다 대고 좌우로 몇 차례 그었다. 가볍게 공기가 흔들린다. 툭 건드리자 바둑판처럼 쫙 쪼개진 얼음기둥은 완전히 동일한 12개의 변을 가진 사각형 얼음의 무더기로 형태를 바꿨다. 단면마다 새하얀 선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것이 잘 드러난다.

“잡티가 많고 투명도가 낮다. 정수와 살균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증거야. 공격용으로 날리는 거라면 어쨌든 식용으로선 기준 미달이다. 거기에 염소이온은 30 이하, 질산성질소는 1 이하, 암모니아성질소는 0.5 이하, 과망간산칼륨소비량은 10 이하, pH는 5.8∼8.0, 증발잔류물이 없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균수는 1㎖당 100 이하, 대장균군은 50㎖ 중 음성이어야 하는데 전부 초과하고 있잖아.”

별다른 표정변화도 없이 딱딱하게 흘러나온 것은 조리와 논리가 정연하게 결합된 설명이었다. 예상 외로 전문적이고 설득력 넘치는 설명에 다소 압도된 효가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가 미덥지 않다는 듯 반문했다.

“그런 수치가 그냥 본 것만으로 안단 말이야?”

“실측으로 단련한 경험치에 의해서.”

“그게 사실이라도 쳐도 내가 원하는 건 카뮤의 판단이라고.”

“카뮤가 봐도 같은 말을 할 텐데? 그 녀석도 기준에는 엄격하니까. 실패작은 깨끗하게 처리하고 재도전을 하는 편이 나을 거다.”

“카뮤는 실패를 나무라는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만 실패에서 학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관대한 녀석도 아니지.”

묘하게 현실감이 있는 발언이었다. 자연스레 수긍해 버린 효가는 눈앞에 놓인 컵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맑은 녹색의 액체 속에 카뮤가 만들고 슈라가 자른 칵테일 얼음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투명하고 윤기가 도는 얼음이다. 고민하는 표정이 된 효가 옆에서 슈라가 혀를 찼다. 테이블 위에 방치된 얼음더미가 응어리져 녹기 시작하고 있었다.

“동결점까지 너무 낮았군. 물바다 되기 전에 증거인멸 해라.”

어딘가 불온한 분위기를 풍기는 단어였다.

“인멸?”

“네가 지금 얼음 만든답시고 끌어 모은 수증기 도로 돌려놓고. 이 부근만 습도가 너무 낮아졌잖아. 주변에 영향을 주는 것부터가 미숙하다는 증거다.”

“미숙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거 무슨 얘기야? 수증기를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고?”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냐, 얼음의 성투사?”

슈라가 코웃음을 쳤다. 왠지 어이없음이나 한심함도 꽤 섞인 것 같은, 그 이상 묻기가 주저해지는 매정함이었다. 말문이 막힌 효가를 내버려 둔 채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 슈라는 라이터를 손에 들다가 언뜻 눈살을 찌푸렸다.

“남의 제자를 마음대로 들볶지 말아 주겠어, 슈라?”

슈라의 손에서 꽁꽁 언 라이터가 뚝 떨어졌다. 얼마간 자리를 비웠던 카뮤가 슈라의 뒤쪽에서 빙긋 웃으며 돌아온 것이다.

“효가의 작품을 봐 주는 건 좋지만 지나친 잔소리는 환영할 수 없군. 심심하다면 팔이라도 한 쪽 얼려줄까?”

카뮤는 퍽이나 팔불출스러운 발언을 하며 효가의 옆자리에 앉았다. 단순한 위협이 아닌 증거로 공기가 슬며시 쌀쌀해졌다. 의자의 등받이가 차가워지는 걸 느낀 효가는 뱃속에 기합을 넣었지만 거리 탓인지 정작 슈라는 시큰둥했다. 손끝을 마찰시켜 불꽃을 일으킨 슈라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빈정거렸다.

“네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이지.”

카뮤가 대답하기도 전에 효가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잠깐 슈라, 나에게 뭐라고 하는 건 상관없지만 카뮤에 대한 모욕은 아무리 카뮤의 동료라도 용납할 수 없어!”

“괜찮다, 효가.”

“그렇지만 카뮤!”

“효가, 앉아라. 날 위해 화를 내는 건 고맙지만 겨우 저 정도 발언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다니, 쿨하지 못하다.” 

진지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효가는 얌전히 도로 앉았다. 깨달은 것이 있는지 부끄러움이 번진 얼굴이다.

“죄송합니다. 카뮤.”

“이 자리의 분위기도 있으니 더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그리고 너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 내 잘못이라면 결국 슈라 자신도 잘못한 것이 되니 제 얼굴에 침 뱉기다.”

카뮤는 쿨하게 말하며 집게손가락을 퉁겼다. 반짝이는 알갱이가 막 연기가 피어오르던 슈라의 담배 끝에 명중했다. 화악 냉기가 퍼지며 불꽃과 연기가 함께 얼어붙었다.

“간접흡연이 더 해로워. 아이들 있는데서 무슨 짓이야.”

입술까지 얼어붙기 직전에 담배를 뱉어낸 슈라가 투덜거렸다.

“난 냉기를 조종하는 타입이 아니야.”

“그래도 일단 나의 선생이라는 입장이니까.”

“네에?”

아무렇지 않게 떨어진 폭탄발언에 효가가 경악했다.

“슈라가 카뮤의? 선생? 스승?!”

“선생이니 제자니 할 정도는 아니야. 그냥 선임병과 후임병 수준의 관계다. 얼리는 법을 가르친 적도 없어. 이 녀석의 소우주는 처음부터 원자의 운동을 멈추는데 특화된 면이 있었으니까.”

슈라가 정정했지만 효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얼리고 자르는 작업도 손발이 놀라운 정도로 척척 맞았다. 예리한 참격계 기술을 쓰는 슈라가 전혀 다른 분야인 냉기나 얼음에 대해 자세한 것도 납득이 간다. 효가는 그만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엎어졌다.

“카뮤에게도 스승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럴 수가!”

“그러니까 그런 거하고는 조금 다르다고.”

“성역의 안내나 기본적인 정보, 기초훈련과정이나 소우주의 제어법이라든지, 원자의 움직임 같은 성투사의 상식과 살아남기 위한 필수교양류의 생활법 등을 배웠지.”

슈라가 재차 정정하고 카뮤가 부연설명을 달았지만 소용없었다.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은 채 뭐라뭐라 중얼거리던 효가는 대충 정리를 끝냈는지 힘차게 고개를 들고 외쳤다.

“스승의 스승은 나의 스승과도 마찬가지인 존재! 슈라, 당신의 말 새겨듣겠습니다!”

“아니, 뭐, 아무래도 좋은가.”

“슈, 우, 라, 아……?”

“어쨌든 정말로 물바다 되기 전에 그거나 정리해라.”

카뮤의 다의적이고 미적지근한 시선을 외면한 슈라가 가리킨 것은 조금 전에 잘라놓은 효가의 실패작이었다. 아무런 조치 없이 그대로 방치된 얼음은 그새 반 이상 녹아 식탁보를 얼룩덜룩하게 적시고 있었다. 얼음과 물을 동시에 승화시켜야 할 상황이었다. 효가는 아직 남아 있는 얼음의 상태를 확인하며 섬세히 소우주를 불태웠다.

“잇키라면 한순간이겠군.”

무심코 중얼거린 효가는 생각난 차에 둘레둘레 주변을 돌아보았다. 형제의 인연으로 이어진 소우주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몰려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독불장군 잇키지만 오늘은 이곳에 있다. 아테나의 칙명으로 슌과 샤카가 나포해 왔던 것이다. 처녀자리 세 사람에게 둘러싸였을 때의 표정은 제법 안쓰러울 정도였지만 과연 도망은 가지 않은 것 같다.

“있다, 잇…키?”

잇키는 분명히 있었다. 구석의 구석, 어째서인지 후끈하게 달아올라 대치하고 있는 샤카와 아이오리아 뒤쪽이었다.

“카뮤! 슈라! 저쪽에서 샤카와 아이오리아가!”

효가는 놀랐지만 대충 상황을 훑어본 두 사람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내버려둬라. 쟤네들 나름의 친목질이니까.”

“아이오로스와 데스마스크인가. 간만에 보는 영토분쟁이로군.”

“그래도 피닉스를 사정범위 안에 두고 있는 걸 보니 감시역할은 제대로 하고 있는데, 샤카.”

“저 위치, 아테나의 실이 걸려 있군. 혹시 샤카가 몰아넣었나? 도주시도는 해 보았던 것 같은데 운이 나빴지.”

“안드로메다는?” 

“아프로디테와 독대 중.”

그 사이 아이오리아가 허공의 별이 되고, 샤카가 데스마스크를 포획하는 광경이 펼쳐졌지만 슈라와 카뮤의 쿨함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평정을 되찾은 효가는 그 대화에서 중대한 사실을 눈치챘다.

“그거, 잇키는 도망을 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도망을 칠 수 없다는 건가요?”

두 황금성투사는 어깨를 으쓱이곤 성실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어느 쪽이든 참견하면 손해만 본다. 불구경은 강 건너에서 하는 거야.”

“남의 프라이버시니까 모르는 척 해 둬, 효가.”

상반된 표현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효가는 가만히 잇키 쪽을 돌아보았다가 마음을 다잡고 태반이 녹아버린 얼음 쪽에 신경을 집중했다. 카뮤의 따뜻한 눈길과 슈라의 냉정한 비평 속에서 신중하게 물분자를 증발시키던 효가는 이윽고 울려 퍼진 요란한 폭음이 하나가 아니었음에도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5. 합리주의자


“적시기란 무엇이냐?”

시온이 물었다.

“프랑스의 천문학자 메시에가 첫 번째로 번호를 붙인 성운의 중국식 이름이며, 울트라맨의 고향입니다.”

키키가 대답했다.

“아니, 울트라맨의 고향은 M78 성운이야, 키키.”

시류가 끼어들었다.

“소우주의 진수란 무엇이냐?”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과 육감을 뛰어넘은 일곱 번째의 감각으로, 아직 이 세상에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네시와 피아사, 코르코이, 리바이어던 같은 각종 UMA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진수(眞髓)와 진수(珍獸)를 헛갈리면 안 돼, 키키. 게다가 전설의 괴수나 미확인생명체 같은 건 우리들 세계에선 그다지 희귀한 것도 아니잖아.”

“성의를 고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하느냐.”

“오리하르콘과 스타더스트 샌드와 가마니온을 적절히 조합하여 용광로에서 끓인 다음, 오크통에 넣어 10년간 숙성시키면 오크통에서 우러나온 색소와 분해산물로 특유의 향기와 색이 가미된 고급스러운 생명의 수프가 탄생합니다.”

“키키, 나는 죽어버린 성의를 되살리기 위해 내가 가진 피의 절반을 고스란히 헌납한 기억이 있지만 그것이 설마 수프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었다니, 금시초문이야.”

“그만하면 네가 노력했음을 인정할 만하다. 그래, 절대영도란 또 무엇이냐?”

“공기조차 얼어버리는 최악의 온도로서, 그리스 문자로는 파이라 하며 숫자로 나타내면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2884197169399375105820974944 5923078164062862089986280348253421170679…….”

“공기를 둥글게 얼려서 깨뜨린다면 그런 숫자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절대영도와는 달리 원주율은 본디 무리수이기 때문에 무리해서 분해하려 들면 뼈와 살이 분리되는 수가…….”

세 사람의 대화는 서로 맞물리는 것 같으면서도 어긋나며, 그 사실에 깨닫지 못한 채 끝없이 이어졌다. 진지하게 시선을 맞추는 시온과 시류, 키키의 앞에는 처음 따라 놓은 양에서 각각 3할, 5할, 7할 가량이 비워진 술잔이 있었다.

“술에 약한 건 변하지 않았군, 시온. 아니, 한 입 마시고도 의식을 유지하고 있으니 장족의 발전인가.”

“꾸준한 수행의 결과라고 합니다. 거기에 젊은 육체니까요. 내주성(內酒性)도 강화된 모양이지요.”

“그런가.”

동호는 흔쾌한 표정으로 병을 기울였다. 맑고 투명한 크리스탈 같은 액체가 아삭아사삭 소리를 내며 흘러 떨어졌다. 도수가 90도에 육박하면서도 무미․무취한 보드카는 내용물이 가볍게 얼어 묽은 얼음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카뮤의 세팅이다.

“그러면 그 내주성은 얼마나?”

“제 기억이 올바르다면 백주 한 병입니다.”

“굉장한데.”

동호가 감탄했다. 일반적인 선으로 적당히 보통인 주량이지만 과거의 그를 알고 있는 입장에선 정말로 놀라운 변화였다. 하지만 반전은 있었다.

“단지 한 병을 비우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립니다.”

“저런.”

“게다가 한 모금 마시고 저렇게 30분에서 1시간가량 떠들어야 합니다.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서요. 그걸 하루 종일 계속하다가 술이 바닥나면 그제야 쓰러지는 거지요.”

“그렇군. 그럼 그 상대는 네가 했던 게구나. 어쩐지 술을 권하면 싫은 얼굴을 하더라니. 나는 그게 너희 일족의 내력인가 했다.”

동호의 확인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무우는 진절머리와 그리움과 즐거움이 오묘하게 섞인 얼굴로 푸념처럼 늘어놓았다.

“내력이기도 하지만 노사께는 비밀이어서 당시엔 말씀드릴 수가 없었지요. 평소와는 다른 시온을 볼 수 있다는 건 재미있었지만 목소리도 내용도 정상인데 돌연 혀가 꼬이고, 적당히 대답하고 있으면 갑자기 공격적인 별빛이 쏟아지고, 그러다 제풀에 풀썩 쓰러지니 어린 가슴에 많이 놀라기도 했답니다.”

무우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내용물이 약간 줄어든 칵테일잔을 옆으로 밀어내고, 다른 잔을 두 손으로 감싸 들었다. 독특한 향미가 풍기는 차가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그렁그렁 흔들렸다. 동호는 대답이 어떻게 나오건 상관없이 희희낙락해 대우주의 진리까지도 파헤쳐낼 기세인 시온을 돌아보고 곤란한 듯이 미소지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저런 상태론 술을 마신다고 하기는 어렵겠군.”

“그렇겠지요.”

“물과 안주는 제대로 먹더냐? 몸에 맞지 않으면 무리하지 않아도 될 것을.”

“노사와 쓰러지지 않고 대작을 하고 싶었을 뿐이겠지요. 200년 동안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렇구나. 적어도 첫잔을 나누고 이야기할 수는 있으니.”

느긋하게 술잔을 비우는 동호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무우도 온화하게 차를 마시며 옆자리의 아귀가 맞지 않는 대화를 즐겼다.

무모하게도 동호와 같은 술을 마시려고 한 시온을 저지한 것은 무우다. 아닌 척 시무룩해진 시온을 위해 같은 보드카로 칵테일을 만들자고 말한 건 동호였다. 실행자는 물론 카뮤였고, 과일 칵테일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시류와 키키에게도 음주를 허가한 것은 시온이었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보드카병에서 나온, 알코올 농도를 최대한 낮춘 사과와 체리와 레몬과 오렌지 칵테일과 스트레이트로 모두가 함께 첫잔을 들었다.

그 한입으로 취기가 확 올라온 삼인조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하는 대담에 돌입한 다음, 제자 쪽을 걱정하던 카뮤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무우가 툭 의문을 꺼냈다. 그의 시선은 착실하게 키키의 이야기를 바로잡는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길로 달려가 버리는 시류를 보고 있었다.

“그 사이 방침을 바꾸셨습니까? 시류, 오늘의 칵테일이 첫술이라고 들었을 땐 놀랐어요.”

“그래?”

“저희들은 모두 노사에게 술을 배운 셈이니까요. 지금의 시류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

“멀리서 손님이 오셨으니 어찌 아니 마실 수 있겠느냐.”

부러 딴청을 피운 동호는 이의 있습니다! 라는 표정의 무우를 곁눈으로 보고 조용히 웃었다. 황금성의를 받은 황금성투사는 최소한 한 번은 여산을 방문한 바 있다. 교황의 명령이었다. 이를테면 대면식이나 신고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신고식이라 하면 형태는 다양해도 신입이 고참에게 재롱을 부려야 하는 것이 기본이고 정석이다. 웃음빛을 띠고 옛일을 회상하던 동호는 무우의 텔레파시가 빛의 화살이 되어 날아오기 직전 시원스레 진상을 밝혔다.

“너희들과 시류의 입장이 다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류에겐 춘려가 있었으니까.”

“춘려?”

무우는 멈칫 생각하곤 수긍했다.

“노사의 양녀인 아이 말씀이군요. 시류가 간혹 이야기하는 오로봉의 소녀.”

“맞다. 춘려가 마시지 않는데 시류에게만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그 소녀는 술을 마시지 못합니까?”

“이런저런 걸 요리에도 쓰고 있으니까 시류보다는 나을 지도 모르겠다만, 일단 열대여섯이 될 때까지는 입에 대지 말라고 해 두었단다.”

“상식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어째서입니까? 아이가 마실 수 있는 술에도 자세하시면서. 설마 남녀차별이라든가, 성역 관계자가 아니기 때문은 아니겠지요?”

“물론 아니지.”

동호는 계면쩍게 손사래를 쳤다.

“한소리 들어서 말이다. 애를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너무 어릴 때부터 함부로 술을 먹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받았거든.”

“누구에게요?”

“춘려를 맡긴 아이에게.”

그 때 북극의 얼음이 녹는 것으로 남극의 펭귄에게 미치는 영향을 갈라파고스적인 시점에서 고찰하던 시류의 귀가 번쩍 뜨였다. 탕 소리가 나게 테이블을 짚고 번개처럼 자리를 뛰어넘은 시류는 허둥허둥 동호의 소맷자락에 매달리며 물었다.

“노사! 춘려를 버린 사람을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예고 없이 빠져나간 톱니바퀴로 인해 회전이 정지했다. 부지불식간에 방치된 시온과 키키가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것에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시류는 필사적이었다. 동호는 새로이 술을 따르며 한가롭게 대답했다.

“알고 있었지.”

“춘려는 노사께서도 모르신다고 했는데!”

“나는 여산의 기슭에 버려진 춘려를 거두었을 뿐이니까.”

“그렇지만 짚이는 사람이 있으신 거죠! 누구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알아서 어찌하려고 그러느냐.”

강하게 동호의 소매를 끌어당기던 시류가 일순 말을 어물거렸다.

“그, 그 사람이 지금도 살아 있고, 만일 춘려의 부모라면 만나서…….”

“만나서 얼굴이라도 짓밟아버릴 것 같은 표정이네요, 시류.”

제3자인 무우가 차분하게 지적하자 시류가 뜨끔 한다. 그렇지만 이내 정색을 하고 맞섰다.

“혼자 살 수도 없는 어린아이를 버리는 인간이 떵떵거리고 살고 있다면 용신의 이름으로 천벌을 내린다 한들 무슨 잘못이 있겠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춘려 자신은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기지 않는다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야! 아이를 버린다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어!”

“거기에 사리사욕으로 성투사의 능력을 쓰다니, 중대한 규칙 위반입니다.”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무우! 성의는 입지 않고 소우주도 태우지 않아!”

“보통 사람 상대로는 충분히 위협적이에요. 아니, 처음부터 성의를 걸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흉악합니다.”

“무우!”

무우의 판단은 정확하게 사리를 분별한 것이었지만 흥분한 주정뱅이에 논리는 통하지 않는 법이다. 시류는 손자국이 남은 동호의 소매를 놓고 일어섰다. 문답무용으로 소우주가 높아졌다. 드물게 감정적이 된 시류의 등 뒤로 푸르른 용이 솟구치려 꿈틀거리고, 그 기운에 자극을 받았는지 흐리멍덩하던 시온의 기색이 설핏 불온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진정하거라, 시류.”

“노, 노사.”

눈을 한 번 깜짝한 후, 시류는 테이블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동호가 당겨 떼어놓은 것이다. 다른 손에 들린 술잔에 작은 파문조차 일어나지 않은 미려한 움직임이었다. 거의 동시에 무우가 팔을 치켜들려던 시온을 붙잡았다. 눈만 끔벅거리고 있던 키키도 반사적으로 시온에게 들러붙었다. 위기일발이었다. 동호는 어안이 벙벙한 시류를 자리에 앉히고 차근히 어깨를 두드렸다. 투기가 눈에 띠게 누그러져 간다. 동호는 자상하게 타일렀다.

“침착하려무나. 나도 춘려의 가족이나 버린 사람까지는 모른단다.”

“그…렇습니까?”

“춘려 자신이 기억해내지 못하는 이상 영원히 수수께끼인 게지. 내가 아는 것은 그 아이를 굳이 여산까지 데리고 와서 두고 간 사람이야.”

다소 진정된 시류는 동호와 무우와 시온의 눈치를 보다 머뭇거리며 반문했다.

“춘려를 여산까지 데리고 온 사람, 입니까? 그냥 버린 사람이 아니라요?”

“그렇지.”

“정말입니까?”

“내 장담하마.”

“그럼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너도 아는 사람이란다.”

“네?”

시류는 놀란 얼굴을 들었다.

“설마 이전부터 유난히 춘려에게 친절했던 산지기 장 아저씨입니까? 아니면 춘려가 장을 보러 갈 때 항상 덤을 주셨던 시장의 고 할머니입니까? 그도 아니면 춘려에게만 뱃삯을 받지 않는 강가의 양 아저씨입니까? 약초를 사 주는 아랫마을의 왕 아주머니? 괜히 치근덕거리는 이웃마을의 서 영감님? 강 건너 마을의…….”

시류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속사포처럼 읊어대는 동안 동호는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전부 부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때의 동호가 속 시원한 해답을 내어준 적이 없다는 걸 잘 아는 시류는 결국 정답을 얻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질문을 바꾸었다.

“그, 그 사람은 혹시 알고 있습니까? 춘려의, 저기, 가족이라든지…….”

“무슨 소릴 하느냐. 춘려의 가족은 우리가 아니더냐!”

“노사……!!”

“그렇겠지?”

“물론입니다!!”

취기에 조금 전까지의 감정의 동요가 더해진 시류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감격하며 동호에게 매달렸다. 격앙한 나머지 울먹거리기 시작한 제자를 다독이던 동호는 넌지시 시선을 돌렸다. 그 사연이 있음직한 눈빛을 따라가던 무우가 시선의 끝을 확인하고 눈을 깜빡거렸을 때였다. 으리으리한 폭음이 장대하게 울려 퍼졌다.

 

by 벽효-아리수 | 2009/12/27 21:15 | ├ 황금보완계획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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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골골 at 2015/02/17 20:45
문장도 내용도 너무나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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