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 로그인


[세인트세이야] 다시 걷는 길

성전 후 성역의 부활. 새로운 시작은 여기서부터.



 

검다. 백지 위에 떨어진 먹물처럼 돌연 나타난 검은 반점은 서서히 주변을 물들이는 듯 하다 단숨에 넓어졌다. 달빛도 별빛도 보이지 않는 밤의 어둠보다 진한 칠흑이 치렁하게 늘어진 장막처럼 육중하게 나부꼈다. 

푸르다. 대지의 틈새에서 솟구치는 샘물과 같은 청량한 푸름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파문과 파문이 부딪칠 때마다 새하얀 물거품이 끓어오르고, 빛과 어둠 사이에서 더욱 도드라진 청람이 광대하게 물결쳤다.

찬란하다.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경계선 사이로 부드럽게 손을 뻗은 서광과 같은 눈부심이다. 어렴풋하고 불명확한 윤곽을 깨끗이 날려 보내며 출현한 빛은 발그레한 아침노을의 모습을 띠고 포근히 내려앉았다.

강대하고 압도적인 존재감이 서로를 휘감는다. 고정된 형태를 갖지 않은 모습임에도 암흑과 파도가, 파도와 빛이, 빛과 암흑이 서로 겹칠 때마다 장엄하기까지 한 울림이 깊게 메아리쳤다. 그것이 정말로 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매우 격렬한 공방전 혹은 설전이 전개되고 있으리라 말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암흑이 소용돌이치고, 파도가 거센 해일을 일으키며, 빛이 산산이 부서져 모든 것을 감싸 안기도 했다.

홀연히 정적이 찾아왔다. 찰나와 같은 겁파인가, 영원과 같은 순간인가. 때가 멈춘 공간 속에서 어느 시점부터인가 흐름이 시작되었다. 분위기가 바뀐다. 강하게 충돌했다가 일제히 거리를 넓힌 세 존재는 교교히 자리를 맴돌았다. 조용하게 또 잔잔하게 세계를 뒤흔들고 있던 파동이 가라앉는다. 암흑이 잦아들었다. 파도가 물러났다. 홀로 남은 빛은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다가 차차 사그라졌다. 삼계를 장악한 신들이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간 것이다.

명왕은 명계로. 해황은 해계로. 여신은 지상으로.

공간이 아닌 공간, 시간이 아닌 시간을 끌어안고 카오스가 서서히 형태를 만들어나간다. 가이아로부터 멀어진 우라노스를 한층 더 베어낸 건 퉁명스레 스쳐간 크로노스의 숨결이다. 에레보스와 닉스가 물러나고 아이테르와 헤메라가 모습을 나타내기 전, 에오스가 장밋빛 손가락으로 거두어들인 옷자락에서 반짝이는 가루가 너울너울 흐르듯 떨어졌다. 깊고 깊은 지하의 세계에, 푸르고 푸른 바다의 세계에, 사랑과 정의를 원하는 인간의 세계에.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고요히 잠든 대지에 점점이 불이 켜졌다. 첫 번째 신호가 오르자 다음은 둘, 그 다음은 셋, 다시 넷, 다섯, 여섯……. 강렬히 타오르기 시작한 그들은 이전 티끌로 사라진 생명이다. 태양의 빛으로 이루어진 황금의 불꽃이 폭발하듯 용솟음치며 텅 비어있던 장소를 차례로 채워나갔다.

실로 243년 만에 펼쳐진 장관을 바라보며 지상을 지키는 회색 눈의 소녀는 다정히 미소하였다.



백양궁의 수호자는 성의 상자 옆에 오도카니 놓여 있는 릴리프를 손에 들었다. 수호별자리의 기호가 새겨진 물건은 각각의 수호궁마다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이 릴리프는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물건이다. 떨어져 나간 모서리가 간신히 붙어 있는 모양이 마치 버려진 묘석을 챙겨둔 것 같다.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린 양자리의 황금성투사는 새로운 릴리프가 필요한 수호궁이 더 있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가해자로서 한 몫을 담당한지라 대체 조건을 내걸기 어렵다는 사실이 약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가해자로서 떳떳하게 보상을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자못 기대가 되었다.

금우궁의 수호자는 실내에 떠돌고 있는 엷은 향기의 존재를 알아차리곤 흠칫 놀랐다가 곧이어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생전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은 그 농후하고 달콤한 냄새와도, 위험하지만 친숙하게 다가오는 장미향과도 다른, 청초하고 순수한 인상이 배어나는 이 향기 역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딘가 느낌이 다르다. 고개를 모로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피자 창가 쪽 난간 위에서 자그마한 드라이플라워가 올망졸망하게 엮여있는 것이 보였다. 살그머니 빛이 바랜 짙은 보라색에서 몇몇 사람과 사건을 떠올린 황소자리의 황금성투사는 그만 쑥스러운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여야 했다.

쌍아궁의 수호자는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화려하게 뚫린 천장에서 스며든 여명이 아릿하게 안구를 자극해 온다. 아픔을 견디느라 가늘어진 눈은 다음 순간 동그랗게 커졌다. 그 아련한 밝음 속에 네 개의 팔을 높이 쳐든 오브제 형태의 황금성의가 우뚝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강해지는 빛이 서로 반대방향을 바라보는 두 얼굴을 나란히 비췄다. 햇살을 받아 무너진 천장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려낸 바닥은 빛과 그림자로 뚜렷하게 갈렸지만 기이하게도 성의에는 전혀 그림자가 지지 않았다. 그들은 본래 선악이나 양면의 존재가 아닌 것이다. 쌍둥이자리의 황금성투사는 무심코 자조하고 말았다.

거해궁의 수호자는 성의 상자에 걸터앉아 나른히 기지개를 켰다. 그렇게도 음산하고 시끄러웠던 망자들이 사라진 공간은 새벽의 공기 탓인지 청정하게 개여 있다. 본래의 역할이 역할이니만큼 그 특유의 분위기는 머지않아 다시 돌아오겠지만 명계의 저편으로 사라진 얼굴들의 행방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게자리의 황금성투사는 두 팔을 뒤로 돌려 몸을 지탱한 채 느긋이 반괴한 궁을 둘러보았다. 언제였던가, 천장이며 기둥이며 벽이며 바닥에 무수히 튀어나온 그것들이 미관상의 이유로 일소될 뻔했던 위기시에 느낀 초조감은 더 이상 없다. 그저 성의 상자로부터 전해지는 나지막한 공명이 기분 좋았다.

사자궁의 수호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눈을 떴다. 다소 파손되어 있기는 하지만 굳건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기둥들이 믿음직스럽다. 어린 시절의 훈련 도중 손이 미끄러져 주춧돌 몇 개를 완전히 박살냈을 때도 전체 균형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아래쪽 궁과 위쪽 궁, 특히 위쪽에서 벌어진 충돌이 워낙 커 그 여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수호궁은 수호자를 닮는다고 말한 이는 누구였던가. 골똘히 생각하던 사자자리의 황금성투사는 저도 모르게 홍소를 터트렸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묻어두려 했던 과거를, 형과의 일상적인 추억을 그 본인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현실이 꿈만 같았다.
   처녀궁의 수호자는 사라쌍수 사이에 가부좌를 틀었다. 곧게 뻗은 두 그루의 나무는 비록 나뭇잎 한 장 없이 까맣게 타버렸지만 형체도 없이 날아간 본궁 대신 표식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온갖 꽃이 만발했던 사라쌍수의 동산도 현재는 폐허를 덧쓴 잿더미에 불과했다. 용케 본태를 건사한 풀잎이 한순간의 접촉으로 순식간에 스러져 흩날린다.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좋은 표본이다. 무참히 뜯겨나간 회색의 동산을 눈꺼풀 안에 쓸어 담은 처녀자리의 황금성투사는 명치 앞에 양손을 모아 선정인을 맺었다. 차원을 넘어 세계를 꿰뚫는 수인 속에서 붉은 꽃송이가 표표히 한들거렸다.

천칭궁의 수호자는 연륜이 깃든 기둥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오랜만의 접촉에 궁이 기뻐하고 있는 것을 안다.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은 쓰지 않으면 맥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243년은 폐허가 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충분히 긴 공백이었다. 차근차근 살펴보면 손때가 올랐던 부분도 세월에 의한 풍화와 부식이 반복되고 두터운 먼지에 덮여 흔적조차 알 수 없다. 통행로 부근만 명목상 청소되어 있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천칭궁은 건강했다. 깊숙한 곳에서 기연가미연가 잠재한 소우주의 잔흔을 감지한 저울자리의 황금성투사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언제 어느 때에도 혼자가 아니었음에랴.

천갈궁의 수호자는 경험한 적이 없는 감각을 즐기고 있었다. 최초부터 없었던 수호자와 도중에 사라진 수호자, 두 이웃이 함께 자신의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상황은 황금성투사의 일원이 된 이후로 처음이었다. 십이궁은 성역을 수호하는 결계의 요점이다. 여신의 신전에서 샘솟듯 흘러나온 소우주를 교황이 확산시키며 지탱하고, 십이궁이 누름돌의 역할을 하여 결계를 고정시킨다. 지난 내전 당시 열둘의 황금성의가 모두 모였을 때도 희미하게 느꼈지만 지금까지의 성역이 얼마나 불완전했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전갈자리의 황금성투사는 이제부터 이러한 나날이 계속된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다.

인마궁의 수호자는 유유히 궁 안을 거닐었다. 반역자를 배출한 부정한 장소로서 은연중 방치된 탓인지 지난 세월에 비해 황폐해졌다는 인상이 강하다. 최근에 급히 보수한 듯한 자취도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체험하지 못했던 입장에선 그립다기보다는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다 문득 내장이 벗겨진 채로 남아 있는 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지 못한 것이라 짐작이 간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예리한 필치로 새겨진 벽속의 문구와 연결되는 광경을 퍼올린 사수자리의 황금성투사는 묵직한 감개에 젖어들었다.
   마갈궁의 수호자는 여신의 신전을 향해 경건히 고개를 숙였다. 13년 간 한 적도, 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행위다. 인간은 모두 자기 본위로 사는 것이라 주장하며 희생과 헌신을 조롱하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본다면 그 표변함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더욱 자세히 아는 사람은 수긍해 주기도 할 것이다. 염소자리의 황금성투사는 자신이 바뀌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 본위로 산다. 단지 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부분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날 뿐이다. 소년의 성실한 이타심과 여신의 위대한 사랑이 보여 주었듯이.

보병궁의 수호자는 서릿발이 내린 천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유의하며 조금씩 원자의 움직임을 활성화했다. 절대영도의 눈보라가 휘몰아쳤던 궁은 여태껏 살인적인 수준의 찬기를 군데군데 두르고 있었다. 원래 다른 궁에 비해서 기온이 낮은 편이었지만 필살의 기세로 방출된 절대영도의 여운은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의 열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차츰차츰 실온이 오르기 시작했지만 결빙이 풀리려면 아직 한참 부족하다고 판단한 물병자리의 황금성투사는 이내 방식을 바꿨다. 머지않아 얼음에서 떨어져 나온 무수한 세빙이 거대한 빙무가 되어 허공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쌍어궁의 수호자는 거무죽죽하게 말라붙은 화원을 보고선 일순 미간을 찡그렸다. 장미를 키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의 장미보다 강인하긴 해도 바람이 불면 휘어지고 짓밟히면 뭉개지고 병충해에 취약한,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한 식물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 화원의 장미는 그 향기로, 그 가시로, 살아 있음으로 죽음을 부른다. 그런 까닭에 수호자의 의사에서 벗어났을 경우엔 지체 없이 시드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허나 지금 화원이 죽어있어야 할 이유는 사라졌다. 물고기자리의 황금성투사는 신선한 수분을 듬뿍 머금은 바람을 맞아들이며 찬찬히 소우주를 불태웠다.

옥좌의 주인은 불의의 사건으로 빼앗겼던 자리를 지그시 응시했다. 집착이 있는 자리는 아니었으나 유한이 남아 있는 자리다. 여신이 현세에 강림한 이 때, 권리와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되돌려드려야 할 자리이기도 하다. 88성투사의 정점에 군림하는 여신의 지상대행자는 두 번 다시 접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교황의 마스크를 쓰다듬으며 그 감촉과 무게를 음미하였다. 스타힐, 여신의 신전, 황도십이궁, 콜로세움, 백은성투사의 숙소, 청동청투사의 훈련장, 잡병들의 거처, 결계의 입구를 감시하는 초소에 이르기까지, 직접 보지 않아도 2세기 반 가깝게 지켜봐 온 광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처참히 무너진 모습도, 땀흘려 재건하는 모습도, 별자리를 내리쏟은 것처럼 빛으로 충만한 모습도 먼 옛날의 영상과 일치하는 듯 하며 달랐다. 이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이 있음에 희열을 느낀다. 243년 만의 진정한 재회가 될 터였다.

전성역에 기원과 자애의 소우주가 넘쳐흘렀다. 이윽고 여신의 옥음을 받든 교황은 아테나와 그 성투사들의 귀환을 소리 높여 선언하였다.

by 벽효-아리수 | 2009/11/05 22:02 | ★ 패러디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dkfltn97.egloos.com/tb/511481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