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15일
[세인트세이야] 悲風慘雨
- 정신간섭계 능력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소년은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멍하니 생각했다. 인간을 초월하는 갖가지 능력자들이 우글거리는 성투사 중에서도 정신에 간섭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전투력의 최고봉에 서는 황금성투사 중에서도 겨우 두셋을 헤아리는 정도다. 같은 계통의 능력이라도 각자의 적성이나 소질에 따라 쓰임새나 효과는 다양하게 나타나는 법이고, 최초에 발현하는 능력을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설령 정신 혹은 뇌를 조작할 수 있다 해도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었을지는 모를 일이긴 하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바라곤 한다. 발밑에서 고깃덩어리가 되어 뒹구는 물체에게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를 단순한 사물로 바꾸라 명령한 이의 기억을 적당히 건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 사람에 대한 과거를 지우고, 저 사람에 대한 추억을 지우고, 그 사람에 대한 사고를 지워서 스스로도 그것을 잊는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을까. 실현되지 않을 가정이기에 망상을 한다. 성역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그것도 조종하는 분야 쪽으로 특출한 정신간섭계 능력자가 빼도 박도 못할 걸림돌이란 사실이 새삼 쓰라리다.
빗줄기가 점점 강해진다. 한 꺼풀 너머로 굵직한 빗방울이 부딪치는 충격과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전해졌다. 소년은 푹 내려쓰고 있던 비옷의 후드를 뒤로 내렸다. 여과 없이 내리치는 빗줄기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감각을 일깨우듯 두들겼다. 얼굴이 얼얼해서 아플 거라고, 흡사 남의 일처럼 스친 사고는 금세 사그라졌다. 천천히 몸을 돌린 소년은 차박차박 물소리를 내며 걷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고 비바람을 받아들인 것은 머리를 식히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아래쪽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머릿속은 일찌감치 얼어붙다시피 한 상태다.
며칠 동안 비가 계속되는 바람에 인적이 드물어졌지만 보통 때라면 행인들이 종종 오가는 번화가의 뒷골목이다. 신원불명의 노숙자가 쓰러진 채 유명을 달리하는 일도 간혹 있으니, 뒤처리가 편리하리란 판단에서 선택한 장소였다. 사인은 심장마비다. 그 이외의 원인은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혹시 지병이 있다면 연관을 지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사망원인인 심장정지가 왜 일어났는가 하는 점은 미궁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만일 어떤 호사가가 사이코메트리나 강령의식 따위를 동원한다 해도 거기서 잡을 수 있는 단서는 지푸라기보다 못한 수준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영혼은 캔서의 영역. 남아 있는 것은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진 몸뚱어리가 마지막에 띄운 표정 뿐이다.
- 그 사람은 아니다. 그 분이 아니야!
소리도 기척도 예고도 없이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시내 한가운데서 칼질이나 총질, 주먹질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성투사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자리의 황금성투사의 소우주는 궁극까지 불태우는 것 자체만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의 죄목은 무단탈주. 발견과 동시에 처분되는 것이 정해진 운명이었다. 그렇지만 데스는 굳이 그에게 최후의 순간을 통보하고 마지막 말을 허가했다. 알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다.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황금성의를 걸치지 않은 황금성투사와 대치한 그는 얼마간 희망을 품었다가 이내 좌절했다. 선례는 얼마든지 있었다. 교황궁과 그 산하 행정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선임의 신관과 사무원, 잡병들은 현재 여느 시대의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정확히는 옛사람이 빠지고 새사람이 들어와 세대가 교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수인계를 포함한 인원교체는 요 2년간 매우 순조롭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병사, 자연사, 사고사, 은퇴 등으로 자리를 떠난 그들의 뒷모습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 죽어나가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일상화되어 있는 성역이라 해도 그 대상이 사무원이나 신관이 되면 보통 상황이라 하기 어렵다.
누구는 조사를 하고, 누구는 관찰을 하고, 누구는 생각을 하고, 누구는 방관을 한다. 그렇게 해서 또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이 사라지고 바뀐다. 탈주라는 죄목이 걸린 그는 황금성투사를 눈앞에 둔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자신과 같은 이유로 처리된 최초의 사람이 누구였는가를.
언제였던가 날카로운 눈매의 동갑내기가 자신의 오른팔을 지그시 노려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또 언제였던가 한 살 연하의 미모의 선배가 장미꽃잎을 하나하나 뜯어 허공에 날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통상의 임무에 가벼운 덤이 붙었다 하여 예정보다 조금 늦게 귀환한 후였다고 기억한다. 조금 더 기억을 파내면 친숙한 교황궁의 신관이 고령을 이유로 귀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기도 했다. 소년은 자그마한 탄식을 흘렸다. 본래라면 지금 자신도 지구 반 바퀴를 돈 장소에 있어야 했다. 이중으로 부가된 명령은 이제 와서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 그 사람은 아니다. 그 분이 아니야!
“짐작은 하고 있어.”
- 어째서 모르나! 알고서 하는 짓인가?!
“우리는 아마 시험받고 있거든.”
소년은 공허한 메아리를 향해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장소에서 이런 형태가 아니더라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처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사라진 사람들 중 성역이나 인근 마을에서 병사하거나 사고사한 사람들 외엔 대개 깊은 오지에 매장되거나 수장되거나 머리카락 한 오라기 남기지 않은 채 원자분해되었다. 그러한 장면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소년에겐 자초지종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렇기에 이번의 임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알기 쉬운 죄목. 정당한 숙청. 남겨진 유체. 견제와 본보기와 복종 의사에 대한 가늠.
“정신간섭계 능력이 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소년은 잿빛 하늘과 잿빛 빗줄기 사이로 홀연히 모습을 지우며 툭 중얼거렸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빗줄기였다.
# by | 2009/07/15 23:53 | ★ 패러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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