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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세이야] masquerade

유식 시리즈, 5식과 6식 사이 정도 


 

첫 만남은 잊었다. 두 번째에서 이름을 들었다. 세 번째로 눈을 마주쳤을 때 입장을 알았다. 그것이 세 번째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것은 만남의 횟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해질 만큼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쌓이는 기억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또 어디서 다시 솟아오르는지 알 길이 없다. 아직 존재조차 깨닫지 못한 기억이 더 남아있을지도 모르고 지금의 기억이 언제까지 남을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에 대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기억이다.

“데스, 마스크?”

루치아노는 잠시 안 본 사이에 훌쩍 커버린 친숙한 아르바이트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이의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미 체격의 차이는 거의 없다. 자신의 체격이 왜소한 편이라는 것은 차치해도 한창 자랄 시기의 아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소년에게 건넨 봉투 속의 빵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출자인에 대한 예의인지 같이 먹자는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기분이 들어 사양했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라고 내심 투덜거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소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이야기한 것은.

“데스에다 마스크라고?”

소년은 손가락에 묻은 가루를 핥으며 심드렁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치아노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또 영어야?”

“덧붙임 같은 거니까?”

“거긴 또 의문형이냐?”

“이번에도 자칭한 게 아니라서.”

소년이 어깨를 으쓱인다. 본의가 아니라는 표정이지만 딱히 거부하는 기색도 없다.

“데스마스크.”

죽음의 얼굴. 죽은 사람의 얼굴. 죽은 사람의 얼굴을 뜬 가면. 루치아노는 빈말로도 좋은 이름이라 칭찬할 수 없는 이름을 다시 한 번 입에 담아보았다. 혼잣말을 되뇐 것으로 생각했는지 대꾸는 없었다.

개인으로서, 공인으로서, 행동으로서, 위치로서, 관계로서, 누구나 그렇듯이 그들도 피차간에 몇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서로 모르는 이름, 의도적으로 버린 이름, 낯선 자리에서 새로 태어나는 이름, 입에 오르지 않는 동안 풍화되어 사라지는 이름이 있을 터다. 거기에 또 하나 추가되었을 뿐이다. 설령 그것이 어떤 불길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언정 소년의 입장에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루치아노는 한 손으로 천천히 턱을 문질렀다. 며칠 동안 면도를 못해 비쭉배쭉 튀어나온 수염이 까칠하게 쓸려갔다.

“기왕에 새것을 붙일 거면 신의 가호가 강하거나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 단어를 써 보는 것도 좋았을 텐데.”

“그런 것 나한테 어울릴 리가 없잖아. 원래 이미지가 이미지이고.”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화되었다는 얘기로군.”

“물질적인 편이 알기 쉽다는 거지.”

소년은 텅 빈 빵봉투를 적당히 구겨 근처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 직후 봉투가 파르스름한 불길과 같은 것에 휩싸였다. 소년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불길이었다. 동시에 처참한 괴음이 귀청을 찢을 기세로 맹렬히 할퀴어대기 시작했다. 탄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하게 쓰레기통 안쪽으로 굴러 떨어진 봉투가 터트린 소리는 아니다. 이건 제멋대로 날뛰다가 불가항력에 부딪쳐 분노하고 절망한 자들의 단말마적인 절규다. 이것을 무저갱을 때려 박는 말뚝소리 같다고 말한 이는 누구였던가. 루치아노가 잠깐 딴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소리가 뚝 그쳤다. 여음도 메아리도 남지 않았다. 루치아노는 처음부터 무엇도 없었던 양 말끔히 정리된 공간을 보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머리 위로 내린 그늘이 점차 진해진다. 인기척이 뜸하기는 해도 잊을 만 하면 사람들이 하나 둘 지나가는 작은 거리가 조금씩 어스름에 물들어갔다. 피곤에 지친 발소리, 수런수런 들려오는 이야기소리,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경적소리, 산만하게 굴러가는 자전거 소리, 환청처럼 아스라이 흩어지는 새의 지저귐, 벽 저편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 평범하게 어우러진 잡음 사이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사라진 비명을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 한쪽 담벼락 밑에 진을 치고 있는 소년과 아저씨에게 힐끔 시선을 주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도 지나가는 일순간이다. 점차 엷어지는 햇빛을 피하듯 나른히 그늘 속에 잠긴 그들이 업무 중이라는 진실은 두 사람만의 사실이었다.

소년이 기지개를 펴거나 손가락을 꺾거나 할 때마다 기괴하게 비틀린 영체들이 차례로 사라져간다. 지극히 일상적인 동작 속에서 비현실적인 불꽃이 깜빡인다. 루치아노에게도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소년에겐 심심풀이 수준의 아르바이트다. 자신이 맡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는 건 옛날에 관뒀다. 그야 처음엔 놀라기도 했고, 기가 막히기도 했고, 열등감을 느끼다 못해 어이가 없어 미친 듯이 화도 냈지만 결국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자신의 능력은 동종업자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동떨어져 있다. 제 형태를 잃고도 기를 쓰며 허우적거리던 영체의 찌꺼기가 왁자지껄하게 달려가는 아이들의 발끝에 채여 사그라지는 광경에 자신을 투영하고 궁상떨 필요도 없다.

루치아노는 낡은 감상을 툭툭 털어버리고 옆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모처럼 개인적인 화제가 나왔다. 어른으로서 성심껏 들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유래는?”

“유래?”

“아무 이유도 없이 덤붙이가 생긴 건 아닐 테지.”

“그게 말이지, 요즘 우리집 벽이며 기둥에 내가 죽인 녀석들이 얼굴이 덜렁덜렁 떠오르고 있어서.”

“뭐야, 그건. 얼굴만? 호러하우스라도 차릴 생각이냐?”

“유감스럽게도 돈 내고 보러올 배짱 좋은 호사가는 없어. 개인적인 컬렉션 취급이야.”

루치아노의 이마에 몇 개인가 고랑이 파였다. 이 녀석을 평가할 때 인간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자. 상식을 버리자.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러쿵저러쿵 해도 인간의 틀을 가지고 인간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이상 인간의 눈으로 잴 수 밖에 없다. 그러는 자신도 꽤 일반에서 벗어난 존재이지만 자신이나 소년이나 그 능력은 어찌되었든 간에 인간인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연히 한계가 있을 터,

“너, 네가 죽인 인간의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거냐?”

“그럴 리가.”

그런 것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겠냐고, 소년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살아 있는 생명도 죽어 있는 생명도, 그의 손으로 이 지상에서 지워버린 숫자는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아는 녀석들 중에는 빈틈없이 기억하는 웃긴 놈도 있지만 난 아니야. 나, 머리 나빠.”

“뭔가 여러 가지로 반박하고 싶다만 뭐 그렇다고 치고, 그 얼굴들이란 건 사람만이냐?”

“아마도. 간혹 동물이나 곤충이나 이상한 게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판별하기도 어렵다는 소리로구만. 그럼 그 얼굴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아?”

“내 집에 튀어나와 날 보고 아우성치고 있으니 나한테 죽은 놈들이라는 게 자연스럽잖아. 충분한 근거지.”

“걔네들이 뭐라고 하는데.”

“의미까지는 모르겠고.”

그건 그럴 것이다. 이성을 잃은 망령의 소리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실력행사로 나갈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뭔가 이상했다.

“넌 매번 상대방 얼굴 똑바로 보면서 일하고 있냐?”

“글쎄, 어땠더라.”

대답하는 소리가 적이 한가로웠다. 마치 남의 일이라는 태도다. 루치아노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소년이 생명의 불꽃을 소멸시키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이 소년의 통상적인 일처리 방식이었는지는 모르고, 물리적으로도 충분히 치명상을 줄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때의 상황으로만 판단했을 경우 육체를 떠난 영혼들이 소년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살해당한 영혼이 자신을 죽인 자에게 복수를 꾀하거나 아예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저주를 내리는 경우는 빈번히 있다. 그러나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은 후에 더욱 힘의 격차가 벌어지는 상대를 찾아내 보복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것도 강력한 악령도 아닌 일반인의 영혼이.

소년의 능력은 힘겨루기에 가까운 통상의 엑소시즘과는 다르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활짝 피어난 꽃이 결국엔 시들어 떨어지는 것처럼 혹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순리에 가까운 것이다. 거기에는 싸운다거나 살해당한다거나 하는 단어가 들어갈 여지마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와서?”

“응, 이제 와서.”

소년은 시원스럽게 긍정했다. 그의 운명이 눈을 뜬 것은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뒤에서 요러니조러니 말이 많은데, 제일 유력한 가설로는 내 명의의 지옥이 정원초과가 된 게 아닌가 하더라구.”

히죽 웃으며 입에 댄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돌아서서 생각하면 오싹하기 그지없는 내용이었다. 적당히 음영이 진 얼굴도 뭉개진 꽁초라도 물려주면 딱 어울릴 분위기다. 어딘지 염세적으로 어른스러웠던 아이는 어느 틈엔가 악당이나 악령과 같은 표정을 만드는데 익숙해졌다. 역시 교육환경이 나빴던 거라고 루치아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비행청소년의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술이나 담배, 마약 등등에 빠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랄까. 삶의 즐거움을 만끽시키기 위해서라도 다음에는 좀 더 맛있을 빵을 구해 두자.

“내 도량이 그렇게 좁다고 생각되는 건 좀 싫으니까 뭔가 그럴싸한 이유를 준비해두는 편이 좋겠지?”

잠깐 현실에서의 도피를 모색하고 있던 루치아노는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물음에 정신을 되돌렸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걸리지 않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한 소년의 눈은 멀찍이 건물 너머로 잠겨버린 석양을 쫓고 있었다. 생기 없는 뿌연 머리카락과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가 그늘의 어둠과 뒤섞여 동일한 색으로 옮아간다. 일몰과 함께 가라앉는 그림자와 같이. 문득 어떤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그 얼굴들이 뭘 어쩐다고?”

“어?”

“그러니까 너희 집에 나온다는 얼굴들, 나와서 뭘 어쩐다고?”

언뜻 고개를 올린 소년은 루치아노가 되풀이한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새삼스레 묻느냐는 얼굴이지만 순순히 설명했다.

“얼굴을 내민 채 줄기차게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대성통곡을 하거나 주절주절 흐느끼거나, 뭐 그런 식.”

“하루 종일?”

“종일토록.” 

소년이 집주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자기가 없을 땐 잘 모른다는 덧붙임은 한없이 무의미한 정보였다. 루치아노는 경험을 되살리며 상상해 보았다. 사방에서 왕왕대며 끝없이 이어지는 원망과 울음소리. 무심코 한 손을 들어 한 쪽 귀를 덮었다. 진저리가 난다. 안 그래도 망령의 소리는 산 사람의 소리와는 다르다. 가청범위를 들쑥날쑥 넘나드는 가파르고 거칠거칠한 소음은 그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좀처럼 귀에서 멀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걸 온종일 듣고 있어야 한다니, 그것도 가장 편안해야 할 자신의 집에서. 일을 마친 후에도 며칠 정도 귀울음에 시달리는 일이 잦은 루치아노는 진심으로 죽는 소리를 냈다.

“끔찍해… 위궤양이나 신경쇠약으로 죽지 않는 게 용하다.” 

“이런 정도로 죽을 거면 일찌감치 세상 하직했을 걸.”

“이웃사촌들은 그렇지도 않을 것 같은데? 항의라든가 들어오지 않디?”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문제는 없어. 들린다 해도 아랫집은 비었고 윗집 녀석은 다른 의미로 신경줄이 단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 영적 능력도 평균 이하 수준이고.”

“그러냐? 잘 됐네, 다들 강해서. 그렇지만 역시 있어서 좋을 것 하나 없잖아, 울부짖는 얼굴 장식품 따위. 그것들을 못 나오게 막거나 싹 치울 수는 없는 거야?”

“그건, 무리일까.”

소년은 손을 흔들어보이곤 가만히 눈을 돌렸다. 깍지 낀 양손 위에 턱을 올려놓고 훅 숨을 내쉬는 폼이 더 이상 이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 없음을 말하고 있었다.

루치아노는 말을 꺼내려다 주변을 살펴보고 입을 다물었다. 소년의 아르바이트는 예전에 끝났다. 원래 일하는 중에는 상대에 대해서는 무엇에 대해서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아도 끝난 후에는 말이 없어지는 아이다. 게다가 어쩐지 벌써 다른 생각에 빠져든 것 같다. 루치아노는 멀거니 소년의 정수리를 쳐다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암담한 확신이 들었다. 이 녀석은 틀림없이 고의적이다. 사태 자체는 의도한 일이 아닐지 몰라도 그것을 내버려두고 은근히 확정시키고 있는 것은 소년 본인이다. 머뭇거림이라고 하기도 뭣한 찰나의 사이 속에서 아직 덜 마른 심지가 착실히 굳어져가는 느낌이었다.

필경 자신은 거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소속이 다르고, 보통이라면 제일 처음에 언급했어야 할 대응책을 제일 마지막에야 끌고나온 무능력한 반상식인이다. 게다가 소년의 새로운 이름은 이미 소년 스스로가 인정한 결정사항이다. 사실 사적인 부분까지 신경쓸 의리는 없다. 그럴 관계도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비즈니스 상대이고, 몇 년간 얼굴을 맞대어 온데다 아직 아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신경이 쓰인다는 얘기다. 기껏해야 전달사항에 곁들어 빵을 나눠주며 실없는 잡담을 하는 정도겠지만 처음 만났을 때에도… 때에도?

“강함이라. 그런가, 그거라면….”

설핏 중얼거린 소년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맺혔다 떨어진다. 어둠에 가려 아렴풋하지만 그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치아노는 짙은 군청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저녁하늘을 올려보며 몰래 탄식했다. 뇌리 깊숙한 곳에서 한 꺼풀 가려진 기억이 슬그머니 장막을 걷어내려 하고 있었다. 불어난 강둑 위로 물방울이 아롱아롱 넘쳐 나오듯, 해가 뜨면 금방이라도 증발해버릴 것 같은 가느다란 물줄기가 조용히 속삭인다.

이 소년은 언젠가 맹세했듯이 자신이 가겠다고 정한 길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고, 가면의 완성이 머지않았다고 말이다.

by 벽효-아리수 | 2009/03/09 23:40 | ★ 패러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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