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 로그인


[봉신연의] 내가 아는 것 · 네가 이해한 것 · 우리가 공유하는 것

가장 최근(...)의 것을 재탕~;;

 “그것, 투골초(投骨草)군요.”

 “맞아, 지갑화(指甲花)야.”

 “네? 이것 금사화(禁蛇花) 아니에요?”

 물밑에서 공공연히 ‘하늘을 나는 하마’로 불리고 있는 영수가 금시초문이라며 깜짝 놀라자 적갈색 머리카락의 군사는 히죽, 푸른 머리카락의 천재도사는 빙긋 웃었다. 항상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죽간과 백서 두루마리들을 어디론가 치워버리고 대신 자리를 떠억 차지한, 군사와 영수와 도사가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부른 화초는 둥근 창으로 비스듬히 쏟아지는 동그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화분을 뺀 전체 길이는 2척 가량. 줄기는 곧게 서 통통하게 굵고 밑에는 마디가 있다. 성기게 가지가 갈라지고 잎은 피침형으로 어긋맞게 났으며 가장자리에는 자잘한 톱니가 도톨도톨하다. 잎겨드랑이에 한 송이에서 세 송이씩 모여 핀 꽃은 고개를 숙이듯 아래로 처지면서 좌우로 넓게 꽃잎을 펴고 있다. 해가 숨어 있는 뭉게구름을 뚝 잘라 달아놓은 것처럼 가장자리만 살포시 붉은 기가 도는 하얀 꽃이었다.

 들고 있던 몇 개의 두루마리를 보란 듯이 태공망 앞에 내려놓은 양전은 마치 포도송이라도 되는 양 주렁주렁하게 열린 꽃송이들을 살짝 어루만졌다.

 “아주 선명한 흰색이군요. 발육상태도 좋고. 곤륜에서 보내왔습니까?”

 “보현이.”

 요즘 국경에서 요새 건설을 총지휘하고 있는 양전이 가져온 것이다. 군사의 최종 확인이 필요한 두루마리임에 틀림없건만, 태공망은 날벌레라도 쫓는 듯한 손놀림으로 휘릭 옆으로 내던졌다. 거기엔 이미 똑같이 취급된 것이 분명한 죽간과 백서 두루마리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과연, 곤륜에서도 이름 높은 구공산의 투골초입니까. 지난번 외성의 성벽수리가 완공됐다고 밤새도록 먹고 마신 끝에 얹히고 체해 사경을 헤맸다는 사실을 아셨나 보군요. 누구씨와는 다른 상냥한 배려십니다, 그려.”

 양전은 팽팽한 윤기가 도는 잎 하나를 따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고 살짝 비틀었다. 잎이 으깨지면서 풀잎 특유의 싱싱한 향기가 미미하게 퍼져 나오자 거기에 이끌렸는지 왼쪽 소매에서 효천견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효천견은 책상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사불상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어슬렁어슬렁 한쪽으로 걸어갔다.

 “뭐야, 그 때 새벽같이 불러서 약 만들게 한 것에 아직 꽁해 있어? 손가락을 따지 않나, 동맥을 친친 묶질 않나, 약은 약대로 무지하게 쓰게 만들었던 주제에. 거기에 보현은 투골초로 키우고 있는 게 아니야.”

 먹고 버린 조개더미처럼 소복하게 쌓인 죽간과 백서더미를 코끝으로 뒤적거리던 효천견은 그 중에서 하나를 입에 물더니 종종종 걸어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친절하게도 끈까지 풀어 두루마리를 펼쳐주었다. 방금 태공망이 던진, 요새 건설 진척도와 그에 따른 잉여예산 활용안이다. 양전은 책상 위에 두 발을 얹어놓고 꼬리를 흔드는 효천견을 다정히 쓰다듬어준 뒤 오른손 검지로 백서를 쭉 훑었다. 으깨진 풀잎에서 배어 나온 붉은 즙이 먹으로 쓴 글씨 위를 길게 가로질렀지만 먹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숙에게는 그 정도가 딱 좋습니다. 도대체 과식으로 인한 배탈 가지고 현장에서 바쁜 사람을 세 번이나 오라 가라 합니까? 보현진인님이야 관상용으로 좋으시겠지만 학습능력도 면역기능도 없는 사숙의 위장엔 투골초가 필수예요.”

 다시 어슬렁어슬렁 방을 돌아다니며 먹과 벼루와 붓을 찾아낸 효천견은 먹물을 적당히 묻힌 붓을 물고 태공망에게 다가와 지그시 눈을 맞췄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지만 뭔가를 바라는 것도 같은, 똘망똘망하고 초롱초롱한 비취빛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려던 태공망은 순간 방안에 화악 퍼진 무언의 압력에 마지못해 붓을 받아들었다. 어느 새 여기저기가 붉게 표시된 백서는 태공망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백서를 검토하기 시작한 태공망은 또 죽간 더미를 뒤적거리는 효천견에게 원망스런 눈길을 보냈다.

 “강아지 교육은 잘 시켰군.”

 “같은 성의 의사를 놔두고 오밤중에 100km 이상 떨어진 사람을 부려먹는 누구씨보단 뛰어난 학습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합니다.”

 “그건요, 주인님이 남 보기 부끄러우니까 차라리 양전씨가 낫다고 바득바득 우기셔서 할 수 없었어요.”

 가시밭에서 통통 튀는 것 같은 대화와 그와는 상관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작업 상황을 신기하게 구경하던 사불상이 툭 끼어들었다.

 “사불상! 쓸데어…읍!”

 “부끄러워?”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하고 외치려는 태공망의 입을 효천견이 새로 가져온 죽간으로 재빠르게 틀어막은 양전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사불상은 이야기를 재촉하는 양전의 시선을 받고 에라, 모르겠다, 하며 말을 이었다.

 “명색이 군사님이잖아요. 과식으로 데굴데굴 구르고 있으면 보기 흉하다고 의사는 부르지 말랬어요.”

 “호오오, 보기 흉해서…….”

 어쩐지 믿지 않는 말투다. 하긴 태공망의 전력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양전이니만큼 무리도 아니다. 태공망이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흉함이 자신에게 일어났을 경우 그것을 흉함으로 인식하지 않고,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면 그 어떤 추태도 마다하지 않은 인물이 아닌가! 밭에서 방금 수확한 고구마를 갉아먹다가 주공단에게 들켜 고구마벌레처럼 밟히는 장면이 만천하에 공개되어도 창피하다는 의식은 팥알만큼도 없는, 좀 비틀린 의미에서 미의식과 함께 추의식도 결여된 이가 바로 태공망이다.

 일부러인 것처럼 말끝을 흐리며 태공망을 돌아본 양전은 반쯤 눈을 내리깔고 명백하게 못미덥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입을 틀어막고 있는 죽간의 다른 한쪽이 양전의 손에 잡혀 있는 탓에 변명도 반론도 할 수 없는 태공망은 흥미가 4할, 웃음이 4할, 그 외의 것이 2할 정도 섞인 미묘한 표정의 양전과 진지한 얼굴의 사불상이 주고받는 대화를 눈을 부라리며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효천견은 다음 두루마리를 물고 태공망 옆에 얌전히 앉아 있다.

 “뭐, 군사로서의 자각이 생겼다고 하면 좋은 현상이겠지.”

 “양전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도 그 말을 들었을 땐 감격했다니까요.”

 “하지만 사숙이라면 식중독을 대비한 구급약 정도 상비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있었어요. 하지만 전부 써버렸거든요.”

 “언제?”

 “왜 마가사장 때 다친 백성들을 위해 왕궁의 의사들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잖아요. 주인님도 함께 가신 적이 있는데 그때 상한 걸 먹고 탈이 난 어떤 아저씨한테 주셨어요.”

 잠깐이지만 먼 산을 보는 눈이 된 사불상의 모습에 어떤 상황이었을지 짐작이 간 양전은 쓴웃음을 1.5할 늘렸다.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네. 사숙 같은 사람이…. 그보다 무료봉사라는 소문이 퍼지니까 찰상, 자상, 타박상, 화상, 골절은 물론 티눈에서 치질환자까지 몰려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어.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다 못한 의사들이 파업을 일으킬 지경이었다며?”

 “네. 주인님의 의사를 부르지 않은 것도 다들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어서 깨우기 미안하다고 하셔서 그런 거예요.”

 “졸린 눈 비비며 나타날 의사들 앞에서 배탈났다고 하긴 민망하다고? 그래서 나?”

 “그게요, ‘양전은 선도야! 그것도 천재도사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놈이야! 요새 건설이 얼마나 시급한 사안인데 벌써 자고 있겠어! 할 일이 태산이라 늦게까지 깨어있을 테니까 빨랑 가서 불러와! 효천견을 타면 금방 왔다 갈 수 있잖아! 왕궁의사는 쓴 약 밖에 못 만들지만 천재도사는 단 약도 만들 수 있겠지!! 윽, 꾸, 에엑, 사…사불상… 나 죽기 전에 얼른…… 꼴깍.’이라고 하셨어요.”

 흐름을 탔을까. 두 주먹 불끈 쥐고 주인을 옹호하느라 열심히 된 사불상은 당시 그 뻔뻔하고 한심스러운 주문에 자신이 얼마나 황당해했는지 그만 잊어버리고 있었다.

 “…인정을 받고 있는 거라면 기쁘지만….”

 “네? 어… 앗!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 양전씨?”

 분노가 2할, 기막힘이 3할, 그 외의 것이 5할이 된 양전의 얼굴을 보고서야 아차한 사불상은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허둥댔지만 이미 불어버린 나팔, 엎질러진 물, 지나간 행차였다. 어차피 그 때 태공망의 어거지에 혹사당한 것은 사불상도 마찬가지지만 이 착한 영수는 무신경한 주인과는 달리 잔걱정과 배려심이 많다. 양전은 나오지 않는 말 대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손짓몸짓으로 팬터마임을 벌이는 사불상의 가상한 노력에 부드러운 웃음으로 답해주고 태공망의 입에 박은 죽간을 쑤욱 뽑았다.

 “민폐예요, 사숙.”

 말투는 여느 때와 같지만 앞머리에 숨은 미간엔 주름이 하나 잡혀 있었다.

 “응? 지금 무슨 얘기들 했어?”

 본 적도, 들은 적도, 죽간을 물고 있은 적도 없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반문하는 태공망에 사불상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양전의 미간 주름이 두 개로 늘었지만 태공망은 얼얼한 입가에도 아랑곳없이 눈앞의 두루마리에 집중하는 척 했다. 야릇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책상 위의 화초가 햇빛을 반사하는 소리, 사불상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 효천견의 꼬리가 탁탁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데굴데굴 구르며 묘하게 분위기를 띄웠다.

 “사숙이 혀가 저릴 정도로 쓰디쓴 약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투골초나 급성자로는 씹는 맛을 내기 곤란하니 안타까운 일이네요.”

 “아니, 전혀.”

 “차라리 위장에 구멍을 내면 배탈 걱정은 없을 텐데.”

 “투골초는 필요 없수다.”

 오는 말이 고우니 가는 말이 성실하다. 조금씩 핑핑해지는 공기에 열린 창으로 들어오던 바람이 창턱에서 멈칫 걸렸다가 발길을 돌려 달아나 버리고, 그 기척에 효천견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 그런데요, 주인님! 양전씨!”

 심각한 현상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안절부절못하던 사불상은 마음을 다잡고 큰소리를 냈다. 덕분에 찌르르 정수리에 꽂히는, 백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듯한 양전의 시선에서 벗어난 태공망은 내심 ‘사불상 나이스!’를 외쳤다.

 “왜 사불상?”

 양전의 태도는 평소와 변함없다. 안심한 사불상은 방안의 공기가 약간 느슨해진 틈에 비집고 들어온 가느다란 기류와 너울너울 춤추고 있는 화초를 손가락질했다.

 “저기, 그 꽃이요, 금사화 맞죠? 저희 고향에서는 뱀을 막는 꽃이라고 울타리 밖에다 쭈욱 심어놨거든요.”

 “그래.”

 “그런데 왜 아까부터 자꾸 투골초라고 부르는 거예요?”

 “투골초니까.”

 대답이 되지 않는 대답에 사불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커다란 머리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반동으로 다시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에 양전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이 꽃을 심어놓으면 뱀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 해서 금사화(禁蛇花)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원래는 단단한 것을 물렁하게 하는 약초로 요통, 불임증, 적취, 어혈, 신경통, 신장결석, 요도결석, 변비, 비만증, 두통, 종기 등에 탁월한 효력이 있지. 효과가 금방 나타난다고 해서 급성자(急性子)로 불리는 씨앗부터 꽃, 줄기, 잎, 뿌리 전부가 약으로 쓰여. 약효가 뼛속까지 침투한다고 해서 투골초(投骨草)인 거야.”

 “뼛속까지요?”

 “목에 가시가 걸렸을 때 급성자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거나 줄기를 달여서 마시면 가시가 녹아 없어지지. 과음과식으로 탈이 생겼을 때도 체한 걸 가라앉혀 주는 효과가 있고. 복용시 조심해야 할 점은 이에 닿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 이도 물렁해져서 빠져버릴 테니까.”

 “우와.”

 사불상은 자기 이빨이 물렁물렁하게 녹아내리는 장면을 상상하고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건 무섭지만… 과음에 과식…… 정말 주인님에겐 딱 맞는 약초네요.”

 그제야 아까의 대화들이 이해된 사불상은 효천견의 감시 아닌 감시 하에 죽간을 펼치는 태공망에게 의미 있는 눈길을 보냈다. 물론 태공망은 그런 건 손톱만큼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두루마리가 거의 처리된 것을 확인한 양전은 대견하다는 듯이 효천견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소매로 되돌리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 외에도 살갗에 가시가 박혔을 때, 벌레 물린 데 등에 좋아.”

 순간 사불상의 귀가 번쩍 뜨였다.

 “정말요?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지금은 씨앗이 없으니까 잎을 찧어 바르면 되는데, 왜?”

 “어제 무길이 나무하다가 팔이며 다리를 왕창 물렸거든요. 빨갛게 부풀어 오른 게 독충에 물렸는지 좀처럼 안 가라앉아서 굉장히 가려워하더라구요. 이거, 효과 있는 거죠? 주인님, 좀 써도 되나요?”

 그러자 태공망이 대답하기도 전에 양전이 잎을 한 움큼 따서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작은 망태기에 담아주었다.

 “조금씩만 발라도 되니까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엉겁결에 망태기를 받은 사불상은 힐끔 태공망을 봤지만 불만 있습니까? 라고 말하는 듯한 양전의 시선 탓인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역시 지은 죄가 있다는 걸 알기는 하는 모양이다. 일단 사태는 진정된 것 같아 짤막하게 안도의 숨을 쉰 사불상은 무길 걱정에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그럼 주인님, 양전씨. 저 잠깐 다녀올게요. 싸우고 있지 마세요!”

 그래도 혹시나 싶어 당부를 남기고 열린 창으로 휑-하니 날아가는 사불상의 뇌리엔 문제의 화초가 금사화와 투골초 외에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많이 주지 않아도 되잖아. 모처럼 보현이 보내준 건데 아깝게스리.”

 “사랑스러운 제자를 위해서가 아닙니까. 구두쇠처럼 굴지 마세요.”

 “상처는 비상식적으로 빨리 낫는 주제에 벌레 물린 건 왜 그리 오래 가냐.”

 “종류가 틀리잖아요. 무길은 사숙과는 달리 성실하니까 약이 필요할 때 정도는 아낌없이 주어야지요.”

 사불상의 기색이 멀어지자마자 화초의 잎을 세며 투덜거리는 태공망에게 아무렇게나 널린 두루마리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양전이 일침을 놓았다. 흩어진 것을 모아서 차곡차곡 쌓아보면 의외로 수가 적었다. 아마 반드시 처리해야 할 안건들은 이미 검토되어 담당부서로 넘어갔을 것이다.

 “하루 종일 산에 틀어박혀서까지 해 올 필요는 없었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한 거잖습니까. 중요한 행사니까요.”

 그랬다. 중요하고 거대한 행사가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풍읍 전체가 들썩이며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제법 훈련도가 높아진 병사들이 대열을 정비하고 척척척 행진한다. 대신들이 죽간을 한 아름씩 껴안고 부산하게 뛰어다닌다. 미화원들은 시종일관 털고 쓸고 닦고 털고 쓸고 닦는다. 커다란 무대가 설치된 왕궁 앞 광장은 마지막 점검을 위해 감독관과 인부들로 북적이고, 각각 행정과 실무지휘를 맡은 주공단과 남궁괄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거리는 곳곳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가득해 마치 주나라 사람 모두가 몰려온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제 해가 서산으로 떨어져 만물이 잠들어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는데도 풍읍은 창공을 질주하는 용의 심장처럼 맹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개전선언(開戰宣言). 새로운 세계에의 도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그런 바깥의 소란과는 반대로 태공망의, 군사의 집무실은 조용했다. 군사가 전쟁 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전쟁이 일어나 버린 후에는 피해를 최소화하며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 가급적 빨리 전쟁을 끝내는 것. 은과 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이기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남은 것은 왕의 선언 뿐이다.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은 각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능력껏 맡고 있다. 대장장이는 무기를 만들고, 목수는 망치질을 하고, 나무꾼은 나무를 하고, 주방장은 요리를 하고, 재봉사는 옷을 깁는다. 오전까지만 해도 성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었던 군사의 할 일은 왕에게 연설문을 넘겨주는 것으로 일단락이 나 있었다.

 화초를 비추는 햇빛이 점차 노을의 색을 띠어간다. 태공망은 한 곳에 모인 두루마리가 책상이 아닌 책장으로 올라가자 피식 웃었다. 순진해서 놀려주는 보람도 있지만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사불상과 무길에 비해서 이쪽은 정말 이해가 좋다. 바닥에 구르는 두루마리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책장으로 옮기는 양전을 보면서 태공망은 서랍을 뒤져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놓았다. 네모나게 자른 천 조각이 여럿. 색색의 실타래. 가위. 손바닥에 올라갈 정도로 작은 약절구와 공이. 안고 있던 죽간들을 전부 처리한 후 손을 탁탁 털며 태공망에게 다가온 양전은 그것들을 보고 역시나 라는 투로 말했다.

 “지갑화(指甲花)군요.”

 “그래. 과연이라고 할까, 용케도 알고 있군. 선계에서도 지갑화를 알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옛날에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실제로 해본 적은 없지만요. 사숙에게 그런 취미가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별로 취미라고 할 것까진 아니야. 하산한 후로는 처음이고.”

 태공망은 하얀 꽃과 푸른 잎을 후두둑 따서 약절구에 넣고 쿵쿵 찧었다. 마음을 두드리는 듯한 작은 소리와 단조로운 리듬이 먼 곳에서 흘러드는 소란함을 슬쩍 밀어낸다. 조그만 절구 속, 한 줄기에서 태어난 하양과 푸름은 함께 짓이겨지며 더욱 진한 풀빛이 되었다.

 “사불상의 서툰 손놀림에 어떻게 맡기나 걱정했지만….”

 주방 아줌마와 함께 주먹만한 만두를 빚거나 찢어진 옷을 스스로 깁거나 콩밭에서 김매기를 도우는 등 의외로 손재주가 있는 사불상이 들었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자리엔 없다. 손가락이 넷 뿐이라 그런지 섬세한 작업은 더디니 맞는 말이긴 하다. 곤죽이 된 내용물을 공이로 휘익 긁어본 태공망은 절구의 벽과 공이 끝에 불그레한 흔적이 남자 공이를 빼서 옆에 두고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기대도 명령도 아니다. 양전은 당연하게 자기 앞에 쑥 내밀어진 태공망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곤죽을 콩알만큼 떠 손톱 위에 올려놓고 천으로 솜씨 좋게 싸 실로 단단히 묶는다. 하룻밤 지나서 풀면 손톱이 붉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귀신이나 질병을 쫓는다는 의미가 있지만 태공망에겐 어울리지 않는 발상이라고 생각하며 차례차례 그의 손가락을 싸던 양전이 툭 중얼거렸다.

 “손톱관리는 엉성하군요.”

 “불편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이런 거 예뻐서 뭐에 써. 너야말로 너무 신경쓰고 있는 거 아냐?”

 “저도 특별히 손질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연산이에요.”

 “아주 자연스럽게 잘난 척 하는구만.”

 익숙한 말투에 버릇처럼 툴툴한 반응을 돌려주면서, 언젠가 궁녀들이 양전의 외모와 손을 화제로 소곤거렸던 일을 떠올린 태공망은 바로 앞에서 날렵하게 움직이는 물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희고 깨끗한 피부. 깔끔하고 단정한 손톱. 손가락도 길고 갸름한 것이 직접타격계의 보패를 사용하는 손치고는 상당히 곱다. 일부러 손질을 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손질을 하고 있는 사람이 보고 분해할 정도로 말이다.

 문득 맑게 갠 하늘의 색이 정말 잘 어울리는 친구가 눈앞의 사람에게 겹친다.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 같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물의 원소를 조종하는 선인도 그러했다. 태공망에게 지갑화의 존재를 가르쳐 주었고, 매번 손톱을 싸 주었던 보현진인의 손은 전혀 다듬거나 하지 않아도 언제나 아기 피부처럼 보들보들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이란 무상한 것이어서 청정한 선계에서의 생활은 그 옛날 보현진인에게도 가혹한 유년시절이 있었다는 흔적을 아무도 눈치챌 수 없도록 지워주었다. 물론 그의 천성적인 체질과 온화한 성격 덕도 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방금 이 방에서 벌어진 상황만 보더라도 양전의 성격이 온화하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다른 손 주세요.”

 “어? 아. 그거 남겠는데. 너도 해 보면 어때?”

 “아뇨. 저는 이대로 완벽하니까요.”

 “……조금은 겸손해 봐라.”

 만일 양전이 손톱에 물을 들이면 천의무봉이란 단어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사람이라 보태줄 게 없다고 억울해하던 궁녀들이 난리굿을 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가슴 속 깊이 파묻으며 다른 한 쪽의 장갑을 마저 벗은 태공망은 손가락 끝마다 천과 실로 친친 동여매어진 오른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빈틈없이 묶여 있지만 답답하거나 불편함은 없다. 물을 묻히는 작업이 아니라면 뭘 해도 지장이 없을 꼼꼼한 솜씨였다. 맨손으로 지갑화의 곤죽을 다루고 있는데도 군더더기 없는 효율적인 동작은 한 손의 엄지와 검지 끝이 살짝 붉어진 정도로 끝나고 있었다.

 “보현보다 나은데….”

 무심코 중얼거린 소리에 실을 자르던 양전이 언뜻 시선을 올렸다. 응연이 3할, 의혹이 3할, 그 외의 것이 4할이다. 의식적으로 한 말은 아니니 다른 의미가 있을 리 없지만 은근한 깊이를 느낀 양전은 완곡한 반어로 대응했다.

 “칭찬으로 받지요.”

 “칭찬이야. 보현은 손끝이 야무지지 못해서 실이 헐거워지기 일쑤였거든. 언제였나 장갑 속에서 다 풀어져 손 전체가 벌겋게 된 적도 있어. 그 녀석도 짓이기고 묶고 하다가 손가락은 고사하고 손바닥이며 손등이며 손목까지 물이 드는 것도 다반사였고.”

 태공망은 왼손을 양전에게 맡긴 채 곤륜십이선의 리더격인 선인의 비화를 하나하나 폭로하며 낄낄거렸다.

 “바늘은 잘 만들지만 바느질은 형편없고, 미리 그려놓지 않으면 동그라미 하나 제대로 잘라내지 못하고, 빨래가 서툴러 보패로 먼지를 분해시키질 않나. 손재주가 있기는 한데 발휘되는 분야는 일정치가 않아서 말야. 손톱만 감으면 되는데 끝나고 보면 손가락 전체가 둘둘 말려 있곤 했지.”

 “그건 의외네요. 보현진인님이 사숙의 허술한 마무리에 곤란해 하셨다면 몰라도.”

 “그런 일은 없어.”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보현은 손톱을 물들인 적이 없으니까.”

 자신이 보현진인의 손가락을 동여매 줄 일은 없었다는 얘기다. 의기양양하게 딱 잘라 말할 내용은 아니지만 말하는 본인은 충분히 의기양양했다. 허나 거기에 돌아온 대꾸는 시큰둥하기 짝이 없었다.

 “단지 사숙의 빈약한 솜씨가 발휘될 기회가 없었을 뿐이네요.”

 “어째서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거야! 무엇보다 빈약한 솜씨란 건 근거도 없는 모략이잖아.”

 “사숙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의 보현진인님께서 거부하실 수준이라면 안 봐도 뻔합니다.”

 “너, 전부터 생각했지만 진짜 직설적이다. 그러다 등뒤에서 날아온 보패에 큰 코 다치는 날이 올 거야.”

 “사숙의 무신경함에는 비할 바가 아니죠. 자, 다 끝났습니다.”

 피차 개의치 않는 말장난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태공망의 열 손가락은 전부 도톰하게 싸여 있었다. 태공망을 알고, 사정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복숭아 가지라도 꺾으려다 상처 난 줄 알 것이다. 혹은 주공단이 식량창고에 설치한 쥐덫에 걸렸다든지, 또는 남궁괄의 매운 소채요리에 트집을 잡다가 손가락에 장을 지졌다든지, 그도 아니면 잠자는 사불상을 잘못 건드려 풀과 더불어 씹혔다든지. 하나같이 군사의 체면과는 동떨어진 것이지만 가능성의 농후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무길과 사불상은 설명도 하기 전에 난리를 피울 것이 틀림없다. 투골초나 금사화와는 달리 지갑화로서의 쓰임새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산에 기댄 석양의 따사로운 빛 속에서 양손을 깍지꼈다 풀었다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본 태공망은 흡족한 표정으로 뿌리라도 박은 양 죽치고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서려는 양전을 손짓으로 말린 후 옆방으로 사라진 태공망은 원통형의 물통과 두 개의 찻잔이 놓인 쟁반을 가지고 돌아왔다. 지갑화와 함께 보현진인이 보낸 차였다. 뚜껑을 열자 촉촉하고 담백한 향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보패합금제 보온통의 위력으로 언제 어느 때라도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차가 쪼르르 찻잔으로 옮겨진다. 보통 사람은 마시기도 겁나할 것 같은 검푸른 차였다. 더불어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빨간 알갱이가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보현 특제의 태극부인차야. 거들어 준 답례로 한 잔 주지. 십이선도 맛보기 힘든 거니까 감사히 마시도록.”

 “…내용물은 뭡니까?”

 “기업비밀.”

 태공망은 한 손가락을 입에 대고 해죽 웃었다. 즐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지에의 공포가 3할, 도전심이 3할, 그 외의 것이 4할의 얼굴로 파아란 김을 내는, 그 이름도 수상쩍은 보현진인특제태극부인차를 한참이나 노려보던 양전은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코 끝에 닿는 엷은 향기는 감미롭고 신선했지만 심해의 바닷물을 퍼 올린 듯한 색감은 식욕을 돋구긴커녕 지옥 끝으로 쫓아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상식과는 거리가 먼 생활. 양전은 술 들이키듯 벌컥벌컥 차를 마시고 있는 태공망을 한 번 흘겨주고 과감히 찻잔에 입을 댔다. 순간 양전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상하고 있던 태공망은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면서 득의만면하게 뻐겼다.

 “어때, 놀랐지?”

 “예에, 여러 가지로. 하계의 독기를 해소시키는 차입니까?”

 “일시적인 효과지만 가끔 기분전환으로 마시기엔 그만이지.”

 태공망의 설명을 끝으로 산뜻한 침묵이 흘렀다. 두 도사는 길게 드리워진 석양의 그림자 속에서 말없이 차를 음미했다. 입안이 얼얼할 정도의 시린 첫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새벽안개를 삼킨 것 같은 상쾌함이 은은하게 감돈다. 식도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전신에 흡수되며 싸아하게 퍼지는 감각. 초봄, 겨우내 얼어붙었다가 새롭게 흐르기 시작한 냇물에 몸을 담근 듯 시원한 느낌. 보통 사람은 처음의 신맛을 견디지 못하고 입에 대자마자 토해버리겠지만 선인이나 도사에게 있어선 속세에 찌든 때를 한 꺼풀 벗겨주는 청량한 맛이었다.

 본래 선인이라 함은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태어난 존재. 더러움 또는 독기라고 부르는 하계의 세속적인 공기는 선인들 자신이 수행을 포기하고 타락하지 않는 이상 별다른 악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예외가 있다면 선인과 선인 사이에, 선계에서 태어난 순혈의 선인 정도다. 그렇지만 독기는 독기. 오랫동안 하계에, 특히 인간들이 바글거리는 도시에 있다 보면 알게 모르게 더러움이 축적되어 찌뿌드드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청정한 산에서 목욕재계라도 하며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이 좋지만 이렇게 내부에서 해소시키는 법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숙이 하산한지도 10여 년이 다 되었군요. 꽤 쌓여 있겠어요.”

 “너야 누구한테 지기만 하면 수행한답시고 맨날 왔다 갔다 했으니 쌓인 게 없겠지.”

 그 말에 양전은 어깨를 움츠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할 말이 없진 않지만 사실은 사실이라 반박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이 독특한 차의 재료와 제작방법이 더 신경 쓰였다. 잠자코 차를 마시는 양전의 반응이 조금 의외였는지 잠시 기다리던 태공망은 원래 부족한 점은 솔직히 인정할 수 아는 녀석이었다고 혼자 수긍하고 남은 차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친구의 배려와 함께 심신을 투과한 시원스런 느낌은 새삼 그간의 시간을 실감케 했다.

 “설마 준비기간만으로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을 줄은 몰랐지만…….”

 무심결에 입 밖에 낸 소리엔 결코 가볍지 않은 감개가 묻어 있었다. 봉신리스트를 받고 하산하면서 신공표와 만나고, 달기와 대면해 처참하리만큼 완벽히 패했다. 넓은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인연을 맺고 동료를 모아, 몇 번의 싸움을 거쳐 서기에 정착해 인간과의 연합체계를 형성했다. 새로운 세상을 맡기고 싶었던 희창이 죽고 그 아들 희발이 의지를 이었다.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계획의 서장. 길고 긴, 하룻밤의 꿈과 같았던 시간들. 내일, 진정한 의미에서 첫발을 내딛는다. 그 중량감을 알아들은 양전이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자 태공망이 돌연 양손을 쫙 펴서 들이밀었다.

 “그런데 양전, 이것의 의미 알고 있지?”

 “뱀 이외에 질병이나 사악한 귀신을 막는다는 주술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 말입니까? 동백후의 관할령보다 훨씬 먼 동쪽지역의 풍습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정답이야. 그런데 이거 알아? 거긴 바로 보현의 고향이야.”

 갑작스런 질문에도 막힘없이 돌아온 대답을 칭찬하듯 태공망이 이야기했다.

 “옛날 보현이 고향의 꽃이라고 동부 앞에 한 포기 심었었지. 작았어. 꽃이 겨우 세 송이 피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그 세 송이의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더니만 어느 사이에 씨앗이 멋대로 퍼져버렸어. 다음해 동부 앞에는 열이 넘는 싹이 돋았고, 해가 지날수록 점점 늘어나 선계에서도 이름난 투골초 재배지가 된 거야. 아니, 자생지인가? 별로 돌보거나 한 것도 아닌데 생명력이 대단하더라고.”

 “본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풀이니까요. 그럼 사숙에게 지갑화를 가르쳐 준 건 역시 보현진인님이군요.”

 “그래. 하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보현은 손톱을 물들인 적이 없어. 목타가 어릴 적에 머리색과 잘 맞는다며 장난삼아 들여 주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하지 않아. 적어도 내 기억으론 한 번도. 그 이유 알겠어?”

 양전이 고개를 젓자 태공망이 지갑화를 바라보며 미소를 띄웠다.

 “보현은 정말 상냥한 녀석이라 사악한 귀신이든 뭐든 전부 받아들이고 싶어 하거든. 남이 하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고, 어차피 선계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지만 거부하는 표시도 하고 싶지 않다는군. 장식으로 물들일 성격도 아니라서 주위엔 투골초로만 알려진 거야. 상징적인 의미에 혹한 나하고는 정반대지.”

 기억 저 편에 있는, 두어 번 만났을 뿐인 보현진인의 인상을 더듬으며 듣고 있던 양전은 마지막 말에 멈칫했다. 그것은 즉, 태공망 자신에겐 거부하고 싶은 존재가 있다는 뜻이다. 질병도 귀신도 아닌 구체적인 상대가. 짐작이 간다. 갈 수밖에 없다.

 “그 때는 나도 어려서 좀 필사적인 데가 있었어.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속절없이 세월은 가고. 언젠가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기 시작할 때였지, 보현과 함께 동쪽으로 놀러갔던 건. 거기서 지갑화를 알게 되고, 처음으로 물을 들였어. 눈에 보이는, 나 자신에의 다짐의 뜻으로.”

 “눈에 보인다고 해도 장갑만 끼고 있잖습니까.”

 “나를 위한 거야. 내가 알고 있으면 충분해. 보현도 알고.”

 처음 물을 들였을 때와 지금의 자신이 별로 변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 태공망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감정은 남아 있다. 결의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절제라는 것을 익혔고, 실행방법이 바뀌었다. 미숙했던 시절의 어수룩한 마음으론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사태. 그것을 짊어질 만큼 성장은 했다. 하지만 아직도 자신은 이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시작을 지켜봤던 친구는 어디까지 알고 이것을 보냈을까. 세계의 운명을 건 싸움을 앞두고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걸까? 아니면?

 난데없이 날아온 보현진인의 황건역사가 보온통과 함께 덜렁 내려놓은 화분을 받았을 때부터 줄곧 고민했지만 멀리 있는 친구의 속을 들여다 볼 재주는 없다. 대신 보이는 건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천재도사. 찻잔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가락 끝이 조금 붉다. 조금 전 태공망의 열 손가락을 싸준 흔적이다. 이마를 덮은 푸른 머리카락 아래로 납득이 1할, 곤혹이 2할, 그 외의 것이 7할의 표정이 살짝 머물러 있다. 뭔가 말하고 싶지만 뭘 말해야 좋은지 모르겠다는 느낌. 불현듯 태공망은 깨달았다.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끙끙거리던 시절과 다르다. 오늘 물을 들인 건 옛날의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꼭꼭 숨긴 다짐을 가시화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거기에 이젠 너도 알잖아. 무거움은 나눌수록 줄어든다고, 지난번에 배웠으니까.”

 너라면 좀 무거워도 거뜬하겠지? 하고 태공망이 다소의 심술을 담아 말했다. 알아줄까, 알아주지 않을까는 듣는 쪽의 문제라고 떠넘기는 말투다. 물론 양전은 알아들었다. 그 속에 들어갔다 나와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을 받아볼 수는 있는 법이다. 순간 양전의 눈동자에 그 외의 것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지만 태공망이 그것을 미처 인식하기 전에 사라지고, 대신 스스럼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양전은 뭔가 생각난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그 앞엔 주황색과 금색이 섞인 하늘이 똑같은 색으로 지평선을 물들이고 있었다.

 “노을이 깨끗하군요. 내일은 맑은 날씨겠는데요.”

 “뭐?”

 “그럼 답례로 저도 한 가지 고백해 드릴까요.”

 갑자기 창 밖에 나갔다 돌아온 화제에 어리벙벙한 태공망을 향해 양전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한 100년 전의 일입니다.” 


 “투골초를 먹으면 뼈가 연해져서 변화술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고? 그래서 닷새나 누워 있었다니, 천재도사님의 쓰라린 실패담치고는 너무 귀여워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어. 하긴 어릴 때니까 겉보기에도 귀여웠겠지.”

 화사하게 피어난 꽃밭을 앞에 두고 태공망은 옛 추억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시간상으론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닐 텐데 옛 소리가 자연스럽게 붙어 나온다. 더 오래된, 이 꽃밭에서의 추억을 공유한 이는 사라지고, 그는 남아 있는데 어째서 이리도 그리운 느낌이 들까.

 “무단으로 침입했던 거 들키면 화내려나? 보현의 특제차를 혼자 연구해서 만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더 화낼까? 나한테 보여주지 않은 건 아직 미완성이라 그렇겠지만 굉장히 비슷했어. 언제부터 연구했는지 몰라도 딱 한 번 맛본 것뿐인데 잘도 거기까지 만들었지. 그 기억력, 창의력, 응용력은 확실히 천재다워.”

 바람이 불었다. 피비린내는 나지 않는다. 금오도의 별과 함께 삶의 강제종료를 맞이한 선도들은 피 한 방울, 뼈 한 조각까지 기화해 사라지고 그 영혼은 봉신대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메마르지도 않다. 인공적인 건조물이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던 금오도 위에 자연적인 구조를 살린 곤륜산이 얹힌 상태로 추락한 덕분에 물과 흙이 구조물의 잔해를 푹 덮고 있기 때문이다. 간간이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산들도 제법 있었다. 지금 태공망이 서 있는 구공산도 그 중 하나로 윗부분 뿐이지만 그럭저럭 무사한 편이었다.

 멀리서 사불상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것을 안다. 선계대전이 끝난 지 고작 며칠. 이것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몸도 마음도 아직 상처투성이지만 지난번 왔을 적에 쏟아낼 수 있는 것은 전부 쏟아냈다. 앞으로의 길은 이미 정했고, 필요한 것이 있어 여기에 왔다. 한번 더 다짐하기 위해서.

 “너에게 말해주고 싶었어. 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내 결의라는 거야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넌 명색이 보좌관이고 여차할 땐 뒤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다짐하고 약속하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더군. 답례로 재미있는 얘기도 들었고.”

 태공망은 자리에 주저앉아 사방팔방에 피어 있는 꽃을 따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거기서 태공망의 손이 잠시 멈췄다. 여섯 개째의 손가락은 이제 없다. 그렇지만 태공망은 다시 뚝뚝 따나갔다. 손톱이 모자라면 발톱에라도 좋다. 그래도 남으면 사불상한테 주면 된다. 그러고 보니 사불상에게 손톱이 있었던가? 잠깐 머리를 긁은 태공망은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작업을 계속했다. 어쨌든 자리를 비운 걸 양전이 알기 전에 얼른 해치우고 돌아가야 한다. 눈치가 빨라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도 행동도 직설적이라 배려를 무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가장 사적인 부분에 대해선 관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건드리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금씩, 그는 상처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억지를 쓰지 않는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정체를 안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간혹 볼 수 있었던, 그 외의 것이라고 표현한 미묘한 감정의 구성을. 기쁨과 기대. 불안과 망설임. 그렇지만 이젠 그 복잡미묘한 표정을 보는 일도 없지 않을까. 태공망이, 다른 모두가 그것을 함께 지고 가기로 했으니까.

 “이것의 신세를 지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 보현.”

 태공망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먼발치에 화려한 꽃이 만개한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는 봉신대가 의연히 떠 있다. 아주 잠시 동안 아릿한 표정으로 봉신대를 바라보던 태공망은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인기척이 사라진 꽃밭은 이름 없는 꽃의 무리로 되돌아가 잔잔히 흐르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by 벽효-아리수 | 2007/10/31 22:53 | ├ 작은 기적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dkfltn97.egloos.com/tb/389817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듀드 at 2010/11/29 01:17
투골초를 먹으면 뼈가 연해져서 변화술이 잘 된다니 어린 나이에 귀여운 꽤나 발상이었네요><ㅎㅎ
전체적으로 잔잔한 전개에다 애잔한 엔딩 엣지있는 개그코드 찾아읽는 재미 쏠쏠하네요 오늘도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_~ 한편한편 읽어 갈 때마다 아쉬워 죽겠어용ㅜㅜㅜ이제 더 이상 업뎃은 바라지 말아야 되는 거냐며ㅠㅠㅠㅠㅠㅠ온정을 베풀어주세요ㅎㅇㅎㅇ.....ㅋㅋㅋ
Commented by 벽효-아리수 at 2010/11/29 11:33
양전 귀엽습니까! 이걸 쓴 후 저도 왠지 모르게 봉숭아 물들이기에 집착했더랬지요. ^^;
한편한편 시간 들여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남겨 주셔서 매번 감사하고 있습니다. 댓글을 계기로 간만에 옛글을 읽어보니 저로서도 감회가 남다르네요. 좋아 보이는 부분도 있고, 고치고 싶은 부분도 있고. 예나 지금이나 제 봉신 패러디의 중심은 기적 시리즈입니다. 항상 언젠가는... 하고 벼르고 있지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