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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돌파 그렌라간] 하늘의 빛은…

다원우주패러렐의 예시...?

 

“하늘의 빛은 모두 별, 나선의 벗이 기다리는 별들…이라.”

툭 떨어진 군소리에 조타륜을 잡고 있던 부관이 힐긋 시선을 돌렸다. 계기판에서 점멸하고 있는 빛과 화면 너머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비교하듯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며 묻는다.

“전반은 그렇다 치고, 후반은 무엇입니까?”

“꿈 이야기.”

“꿈?”

"내가 지구에서 우주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오른다리를 왼다리의 무릎 위로 올리고 비스듬히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함장이 머리 위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은 삐딱한 자세지만 아직껏 떨어진 적이 없는 고로 별다른 지적을 했던 적이 없는 부관은 대신 다른 문제점을 꼬집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자고 있었습니까?”

“응? 어디, 시간상으로는…….”

그들 사이의 대화가 끊긴 것은 약 10분 전이었다. 함장은 팔걸이에 오른팔을 얹고, 오른손 위에 턱을 괴며 시계의 초침을 확인했다.

“한 8초 전부터 6초 전까지.”

문득 부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를 본체만체 함장은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밤의 어둠에도 지지 않는 휘황한 도시의 불빛이 비추는 우주를 향해 그라펄대가 나선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고, 그것을 동경하는 어린아이 옆에서 착실히 나이를 먹은 내가 한 말이야.”

“당신은 당신이었습니까?”

“뭐, 얼굴에 금이 쩍쩍 간 아저씨였지만.”

“설마… 다원우주에 다녀오신 겁니까.”

“아마도.”

자칫하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꿈을 꿀 뻔했는데도 담력이 좋은 것인지, 둔한 것인지 모를 천연덕스러운 대답이다. 부관은 짧게 한숨을 쉬고 지나온 항로를 서브 스크린에 띄웠다.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은 이내 확정할 수 있었다.

“방금 전에 통과한 자기장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선체에의 영향이 없어서 방심했더니만, 예상 외의 사건을 일으켜 주었군요.”

부관은 재빠르게 패널을 조작해 자기장의 패턴과 특징을 기록했다. 본래 기본적인 측정기록이 자동적으로 남지만 수동 조작으로 개별인식을 부여한다. 언뜻 보기엔 특이점이 없는 자기장이었으니 그 자체만으로 틈새가 열렸는지 혹은 주변의 어떤 요소가 결합되었는지 이제부터 풀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부관은 계기판을 체크하며 예사롭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그 세계는 평화로웠습니까?”

“나름대로.”

함축적인 물음에 해석의 여지가 가득한 대답을 내놓는다. 뒤돌아보는 황색의 선글라스 안쪽에서 예리한 안광이 번뜩이자 함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형을 잃고 인간을 해방시켰다. 사랑하는 여인과 신뢰하는 여러 동료들을 잃고 나선족을 해방시켰다. 많은 것을 지킬 수 있었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마음 속에만 담고, 환히 열린 우주를 뒷세대에 넘긴 후 훌쩍 사태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오직 자신의 다리로만 자신이 살고 있는 별을 걸었다. 피부가 거칠어지고, 옷이 해지고, 가끔은 허기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밟을 수 있는 모든 땅을 밟으며 돌아다녔다. 은하계마저 뚫어버린 드릴이 지나온 땅을 하나하나 짚을 때마다 은하도 이 작은 별도 동등한 생명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 모성에 갇혀 있던 은하계의 나선족들은 우주로 나와 평화와 생존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할 일을 전부 끝내고 유유자적 나그네의 삶을 만끽하는 평화로움이 실현된 세계였지.”

간단한 설명 뒤에 딸려온 함장의 감상을 들은 부관은 팔짱을 끼며 가볍게 코웃음을 지었다.

“그건 당신이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피한 거였겠지요.”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도 아니었는걸.”

“적성 안 맞는다고 홀랑 떠넘기기군요. 그래, 하고 싶은 일은 있었던 건가요?”

“살아가는 것 자체…였으려나.”

“그리고는 어디선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는 겁니까. 어중간한 의문형으로 말하지 마세요. 2초간이라고는 해도 당신이 산 당신의 인생이지 않습니까.”

“나지만 내가 아니잖아.”

가차 없는 추구를 받은 함장이 툴툴거렸다. 인생을 살면서 무수히 부딪치는 선택의 기로에서 분기해 생성되는 다원우주. 자신이 선택했을지도 모르는 길.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미래. 그러나 다른 선택으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간 다른 세계의 자신과 여기에 있는 자신이 같다고는 할 수 없다.

“같은 옹달샘에서 시작된 물줄기도 오르고 내리고 갈라지고 하다 보면 완전히 별개의 강으로 분류되는 법이고.”

“그렇지만 결국 바다에서 만납니다.”

애써 든 예가 한 마디로 분쇄되었다. 무심코 고개를 움츠린 함장은 ‘어차피 죽으면 다 똑같겠지.’라고 웅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뭔가를 생각하던 부관이 조금 진지하게 물어왔기 때문이다.

“그 세계가 마음에 들었나요?”

아픔도 고통도 행복도 모두 뭉뚱그려서. 잠시 눈을 깜박인 함장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하긴 그 세계의 나도, 지금의 나도, 어느 쪽도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어온 결과니까. 그 세계의 내가 여기 있는 나를 봐도 같은 것을 생각하겠지.”

부럽지 않다. 불쌍하지 않다. 자신이 그렇게 하고자 하여 걸어온 인생이다. 어느 차원에 있더라도, 어떤 인생을 살고 있더라도 자신이 자신이라면 가슴을 펴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삶, 나의 우주라고.

“뭐, 개중에는 아닌 나도 있을 수 있지만.”

“자신 없는 사족은 달지 않아도 좋아요.”

속삭이듯 나온 목소리에 부관은 무심코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헛기침으로 속이며 팔짱을 풀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보지요.”

“뭔데?”

“나그네인 당신은 혼자였습니까.”

그러자 함장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부관을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의 질문보다 어조는 가볍지만 목소리는 조금 낮고, 훨씬 진지한 얼굴이다. 아마 스스로도 대답을 예상하고 있겠지만 확인하고 싶은 것이리라. 입장이 반대였다면 피차 비슷한 것을 물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함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네가 함께였어, 부타.”

부관의 얼굴이 언뜻 밝아졌다.

“조그만 돼지두더지인 채였지만.”

밝아진 얼굴에 미묘한 동요가 퍼졌다.

“나는 잊지 않아. 네가 변신했던 그 날의 일을.”

함장이 먼눈으로 웃자 부관이 다소 부루퉁한 어조로 정정했다.

“그건 변신이 아니라 진화입니다.”

“겉모습이 바뀌었으니까 변신이라는 말도 딱히 틀린 건 아니잖아.”

“전혀 다릅니다.”

“어떻게?”

“그건…….”

딱 잘라 말하려던 부관이 멈칫 우물거리더니 획 몸을 돌렸다. 이 화제는 끝이라는 듯 새삼스럽게 계기판을 만지작거리는 뒷모습이 어째 조금 쓸쓸하다. 함장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바로 앉으며 느긋하게 깍지를 꼈다. 진화와 변신의 차이점이 표기와 어감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 정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넌지시 말해 본다.

“역시 작았던 넌 굉장히 귀여웠지만.”

부관의 어깨가 아주 조금이지만 움찔 흔들렸다. 진화해버린 그는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변신할 수 없다. 진화란 간단함에서 복잡함으로, 하등함에서 고등함으로 발전하는 것. 나선력으로 아득해야 할 시간을 뛰어넘어 급격하게 진화한 신체는 과학의 힘으로 개조라도 하지 않는 한 퇴화가 허용되지 않는다.

“부러워?”

“…아니오.”

“후회해?”

“아니오.”

“다원우주에 끌려들어간 것이 나여서 다행이었나.”

“시몬!”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몸을 돌린 부관은 다음 순간 흠칫 굳어졌다.

“여기의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여기의 내가 외롭다고?”

장난기를 띤 입가와는 달리 진심 이외의 것은 일절 포함되지 않은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주먹에 들어간 힘이 서서히 빠져나간다. 부관은 힘없이 늘어질 뻔한 손을 얼른 수습해 뒤로 돌리며 강하게 말했다.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잖습니까.”

“응, 그렇지.”

함장은 가슴 깊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그리고 넌 지금도 충분히 귀여워.”

“그거 잘 됐군요.”

멋쩍음이라고는 좁쌀만큼도 없는 새침 뗀 대답에 함장이 머리를 긁적인다. 자신이 함장의 키를 추월했을 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부관은 어깨를 으쓱이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화면의 저편에는 여전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빛이 형형하게 번쩍거리며 스스로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잠시 그 하늘을 바라보던 함장과 부관이 입을 연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하늘의 빛은…….”

by 벽효-아리수 | 2007/10/02 08:31 | ★ 패러디 | 트랙백 | 핑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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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스이나 at 2007/10/23 01:11
이번에도 멋진 그렌라간 소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ㅠ//ㅠ 아리수님의 글은 몇번이고 되새겨 읽으면 읽을수록 더 아련한 느낌이라 굉장히 좋아해요. 낡은 책장을 계속 팔락이게 되는 그런 기분이랄까ㅠㅠㅠㅠㅠㅠㅠ1화 프롤로그의 붕대함장 버젼 참 좋아하는지라 이번 소설 정말 행복해하면서 읽었던 것 같아요. 부관,아니 부타는 정말 바람직하게 성장했군요!!!

아참,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아리수님 이글루스 주소를 제 홈페이지에 링크하고 싶은데 괜찮을런지요? 아리수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아리수님의 소설을 다른 분들께 소개하고 싶어요ㅠ///ㅠ아리수님의 답글 기다리겠습니다!
Commented by 벽효-아리수 at 2007/10/23 17:38
감상 감사합니다. 사실 이 글에는
어느 시점에서 분기한 다원우주인지는 불명. 일단 배경은 우주. 배에는 시몬과 부타 뿐일지도. 그럼 선장이나 캡틴이라고 써야 할까. 전함이 아닌 이상 함장이 아니니까. 네모도 자기는 선장이라고 박박 우겨댔지. … 시몬과 부타가 있으면 우선 좋아!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한다! 시몬과 부타, 둘 만의 그렌단이다!!
.....라는 집필 동기 겸 후기가 있답니다. 코르셋도 좋고 붕대도 좋으니 부타랑 행복하게 살아다오~하고 빌고 있어요. ^^ 그리고 글이 읽을 때마다 아련해지는 것은 수정이 빈번하기 때문입...;;;

링크해 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다음에 홈페이지 주소 알려주세요. (죄송합니다. 주소 모릅니다. ^^;;)
Commented at 2007/10/23 19:2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벽효-아리수 at 2007/10/24 08:50
앗, 가 본 적이 있는 홈페이지네요. ^^ 링크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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