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 로그인


[세인트세이야] 한 떨기 꽃에 얽혀

유식 시리즈 완결 뒤, 전원 부활 전제

 

문득 불온한 소우주를 느낀 아프로디테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대충 짐작이 가는 바깥의 말썽보다는 읽고 있는 책의 뒷내용이 더 궁금한 탓이다. 게다가 남은 것은 불과 몇 장. 그 한 장 한 장이 넘어갈 때마다 바깥의 불온한 소우주도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다. 이윽고 만족스런 미소와 함께 아프로디테가 책을 덮은 순간, 날카로운 천둥소리와 같은 충격이 쌍어궁을 덮쳤다.

“남의 뜰에서 난동을 부리면 안 된다고 가르쳤을 텐데. 어차피 우이독경이겠지만.”

아프로디테는 장시간의 독서로 굳은 어깨를 빙빙 돌리며 창을 열었다. 푸른 이파리와 붉은 꽃으로 꽉 찬 창 밖 풍경 속에 다소 이질적인 금빛 형상이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프로디테는 창턱에 손을 짚고 훌쩍 뛰어넘어 화단에 내려섰다.

“장미에 화풀이하면 안 돼, 샤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프로디테는 주변의 장미가 손상될 리 없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건드리면 화상을 입을 것처럼 높아져 있는 소우주는 교묘하게 꽃과 잎을 피해 사방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제 입으로 약자에 대한 자비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이상한 곳에서 자비를 베푸는 녀석이다.

“왜….”

샤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왜 이게 여기에 있지?”

샤카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지만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아프로디테는 부러 모르는 척 반문했다.

“뭐가?”

순간 샤카의 소우주가 지옥의 업화처럼 화르륵 불타올랐다. 이래서야 적당히 빠져나간다 해도 장미들이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 물론 각종 성투사들이 지나다니는 통행로에 있는 이 장미들은 거의 잡초 수준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어중간한 소우주에 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상대다. 아프로디테는 샤카 옆으로 이동하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몰라.”

“몰라?”

“따로 심은 적 없거든.”

“멋대로 자랐다고?”

“어느 틈엔가. 나도 안 건 나흘 전이었는걸.”

그 대답에 샤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가 쌍어궁을 찾은 것은 일주일 만이다. 그리고 그 일주일 동안 아프로디테는 쌍어궁을 비운 적이 없다. 거기에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광대한 화원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단순히 어디에 어떤 식물이 얼마만큼 있다는 수준을 껑충 뛰어넘어 덤불의 그늘 속에서 움트는 잡초의 싹이 몇 개인가까지 꿰뚫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다. 그런 아프로디테가 꽃이 필 때까지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게다가 장소는 늘 지나다니는 통행로. 즉, 이 꽃은 완전한 형태로 갑작스레 출현했다는 것이 된다.

누군가가 몰래 심어놓았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아프로디테의 소우주가 깃들어 있는 흙에는 아무런 자취도 남아 있지 않고, 키울 수 없는 식물은 없다고 호언하는 쌍어궁의 화원에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인간도 없거니와, 이 화원에서 아프로디테의 눈을 속인다는 것은 보통을 넘어 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로 압축되지만…….

“여신은 미국 체재 열흘째, 데스는 엿새 전부터 출장 중.”

“……….”

“그 외에 이런 참견을 할 만한 신이나 존재는 짐작이 가지 않고.”

“……….”

“환상이나 환각이 아닐까 하고 이것저것 시험해 봤지만 뿌리도 단단하게 내려 있어. 신기하지?”

곧게 뻗은 녹색의 줄기 끝에서 장미와는 다른 화려함을 뽐내고 있는 붉은 꽃이 아프로디테의 손가락에 밀려 가볍게 흔들렸다. 일순 샤카의 소우주가 꿈틀거렸다. 이 꽃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인 아프로디테는 내심 웃음을 지으며 미끼를 던져 보았다.

“갖고 싶어?”

또 한 번 샤카의 소우주가 물결치듯 흔들린다. 황금성투사라도 알아채기 힘든 미묘한 변화였지만 그것을 노리고 말을 건넨 아프로디테에겐 명백하기 이를 데 없는 반응이었다. 아프로디테는 매끈하게 솟아오른 줄기를 어루만지며 다시 말했다.

“사라쌍수 동산으로 옮겨 줄까?”

닫은 눈꺼풀 속에서 잡아먹을 듯 꽃을 바라보던 샤카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 꽃잎을 감싸듯이 강하게 서 있는 수술이 닿았다. 본래 그가 접하곤 하는 붉은 꽃은 아프로디테의 장미처럼 실재하거나, 샤카 자신의 연꽃처럼 현실에까지 영향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이며 상징, 진리에의 길 위로 내리는 축복, 그것이 이 꽃이 가지는 의미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피어 있는 꽃은 그 출처가 어떻든지 간에 단순한 생명체였다. 샤카는 손을 거두고 한참을 생각한 뒤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승낙할 줄 알았던 아프로디테가 의아해했지만 샤카에겐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여기에 두면 관리는 만전일 테지.”

“그야 물론.”

“원인을 알 때까지는 맡겨 두겠어.”

그 말을 끝으로 샤카는 획 몸을 돌려 미련 없이 화원을 떠났다. 맡겨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 꽃은 자신의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머리를 긁적인 아프로디테는 빠르게 멀어지는 샤카의 소우주가 오히려 높아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한숨을 쉬었다. 데스의 출장지는 분명 리히텐슈타인 공국이었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지만 그 전에 긴급 호출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원인을 제공, 아니 보관하고 있는 입장에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인지, 그냥 데스에게 맡겨 두는 편이 좋을 것인지 고민하던 아프로디테는 샤카와 엇갈리듯 쌍어궁에 들어온 거구의 성투사를 보고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어서 와, 알데바란.”

“어쩐지 샤카가 부루퉁한 얼굴로 내려가던데 무슨 일 있었어?”

“뭐, 조금.”

아프로디테는 상쾌하게 웃으며 부분적으로만 인정했다. 그만큼 뚜렷하게 티가 난다면 분화 직전인 위험상황이겠지만 도중에 알데바란과 마주쳤으니 얼마간은 안심해도 좋다. 아프로디테는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너글너글한 알데바란의 소우주와 접촉한 것으로 가슬가슬하게 거칠어진 샤카의 정신도 조금은 나슬나슬해졌을 것이다. 실제 보병궁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장미들이 전해오는 샤카의 소우주는 제법 안정되어 있는 상태다. 아프로디테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천연 아로마와 같은 역할을 해 준 알데바란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의 말을 고했다. 그 사이 통행로를 척척 걸어온 알데바란은 새로운 꽃을 발견하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응? 이 꽃은 못 보던 거로군. 새로 심었어?”

“석산이라는 꽃이야.”

“특이하게 생겼는데.”

“성역에서 자라는 건 처음일 걸.”

“그래? 어디서 본 듯한데.”

“출장 갔을 때?”

“아니, 분명 성역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던 알데바란은 저 아래 보병궁의 그늘 밑으로 사라지는 샤카의 잔영을 보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처녀궁이다.”

“뭐?”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소리에 아프로디테가 되묻자 알데바란이 허리를 굽혀 석산과 높이를 맞추며 대답했다.

“처녀궁이야. 언제였는지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샤카가 처녀궁의 뒤뜰에 구근을 심는 걸 도운 적이 있거든.”

알데바란은 석산을 이모저모 뜯어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 꽃이야. 그 때 꽃이 피어있는 걸 통째로 심은 것도 있었으니까.”

밝게 시작된 말은 조금 흐려지며 끝났다. 알데바란의 표정을 미루어 보건대 그 결과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실패했던 것이리라. 아프로디테는 납득했다. 샤카가 단서를 달아놓으면서도 순순히 물러난 이유는 이것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분했을 것이다. 스스로는 그것을 부러움에 의한 분노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아프로디테에겐 놀라움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부러움으로, 다시 분노로 시시각각 변환되었을 샤카의 심리 상태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마 ‘내 허락도 없이!’가 아닐까. 물론 전제조건이 충족되어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아프로디테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로디테는 다음에 한 번 데스와 이 화제로 심도 없는 대화를 한 번 나눠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앞의 석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생하고 꼿꼿하게 서 있는 이 꽃은 나흘 전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약간 자란 것 같았다. 정말 이 꽃은 어떻게 피어 있는 것일까. 어떻게 생각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피어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현상이다. 흙의 기억을 읽고, 주변 식물들에게 캐물어도 별 소득이 없는 것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계속 소통을 시도해 봤지만 석산 자체는 계속 묵묵부답이다. 그러고 보니 저 세상에서 피워낸 석산도 매우 조용했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정말이지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다.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가 무심코 한숨을 내쉬자 알데바란이 걱정스럽게 불렀다.

“왜 그래, 무슨 고민이라도?”

“아니, 단지 여기가 쌍어궁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사정을 모르는 알데바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는다.

“뭐, 이걸 발견했을 때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까 구실은 이미 만들어놨지만.”

아프로디테는 석산을 톡 하고 퉁긴 뒤 미소 지었다. 거해궁의 서고에서 빌려온 책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깝다. 여차하면 옆에서 얌전히 이야기해 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 좋은 알데바란의 도움도 받자. 아프로디테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양한 색채로 어우러진 화원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피해를 주는 것은 고의든 실수든 장난이든 사랑싸움이든 용납할 수 없다.

“정말 그런 녀석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길 수 밖에.”

by 벽효-아리수 | 2007/09/21 10:08 | ├ 황금보완계획 | 트랙백 | 덧글(4)

트랙백 주소 : http://dkfltn97.egloos.com/tb/379368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제절초 at 2007/09/21 10:12
아니 이럴수가. 아프로디테를 가지고 팬픽을 쓰시다니요 'ㅁ'!!!! 흑흑;ㅅ; 맨날 찬밥인 아프로디테라서 이렇게 팬픽에도 나오는걸 보니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ㅅ;(실은 제가 물고기자리...)
Commented by 벽효-아리수 at 2007/09/21 21:58
제 안의 연중조는, 데스는 강하고, 아프로디테는 정말로 멋지고, 슈라는 뭔가 히스테릭합니다. 때문에 애니, 특히 극장판은 인정할 수가 없지요. ^.^;; 유식 시리즈에도 일단 등장은 하고 있습니다만...
Commented by at 2010/02/10 15:25
에 유식시리즈가 어디에 있는 건가요?
Commented by 벽효-아리수 at 2010/02/11 10:02
유식 시리즈는 일단 9편 구성으로 3편까지 올라와 있었지만 현재 수정 중입니다. 진도가 지지부진해서 언제 공개될지는 모르겠네요. 첫 구성에서 시간이 꽤 지나 이제 단순히 유식 시리즈라고 부르기 어렵게 되었다는 문제도 있고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