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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돌파 그렌라간] 불문법

문서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법

 

종이 한 장 한 장의 무게는 대단찮은 것이지만 그것이 두 장이 되고, 넉 장이 되고, 다시 열 장 스무 장을 넘어 점점 뭉치를 이루게 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중량을 지니게 된다. 게다가 오늘처럼 습도가 높은 날은 아무리 통풍설비가 잘 된 실내에 있어도 뭔가 공기조차 무거운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온통 서류에 점령되어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책상을 대충 파헤쳐 납작하게 짓눌린 머리를 발굴해 낸 키탄은 꿈쩍도 하지 않는 그 머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종이의 단면은 의외로 예리해서 잘못 스치면 꽤 쓰라린 상처가 생긴다. 다행히 완전히 엎드려 있어 얼굴이 다칠 염려는 없지만 빠끔히 열린 목덜미라던가 펜을 쥔 채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팔은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 올린 상태라 미리미리 예방조치를 취해 두는 편이 좋다. 키탄은 가급적 서류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아마도 결재 사인을 하던 도중에 무너진 서류더미에 깔렸을 총사령관 주위에 적당한 공간을 확보했다. 흐트러져 있는 양으로 미루어 보건대 오늘 이 책상에 쌓였던 서류더미의 높이가 평소의 두 배 이상이었을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손에 든 서류를 읽어본 키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서류 작업은 질색이지만 그 서류가 법무국장의 권한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내용인 것은 언뜻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총사령관의 책상 위에서 떠다닐 필요가 없는 서류라는 얘기다. 보통 이러한 서류는 보좌관 선에서 걸러지고 처리되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사정이 좀 다른 것 같다. 키탄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 서류를 한 쪽에 치워두고 재차 서류더미를 헤집었다. 신경 써서 유심히 살펴보니 문제의 서류와 비슷한 부류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키탄은 그것들을 보이는 대로 하나씩 끄집어냈다.

한 장, 한 장, 다시 한 장. 뭔가에 홀린 듯 열심히 서류를 건지던 키탄은 어느 새 한 자 가량의 서류 더미가 자기 뒤에 생긴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문제는 그 정도 양을 빼낸 것 가지고는 바다에서 물 한 바가지 퍼낸 것처럼 그다지 티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키탄은 수북하게 쌓여 있는 책상 위의 서류와 자신이 빼낸 서류더미를 번갈아 보다가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고개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키탄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조금 망설였다가 다시 찾고 빼고 쌓는 작업을 반복하여 서류의 높이를 배로 만들었다. 여전히 별로 줄어든 걸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해 두면 약간이나마 휴식시간을 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키탄은 양팔을 앞뒤로 돌리고 상체를 좌우로 구부렸다 펴며 준비운동을 한 후 새하얀 서류바다 속에 덩그러니 떠오른 남색 머리를 두어 번 상냥하게 두들겨 주었다. 그러자 그 충격에 놀랐는지 팔과 엎어진 얼굴 사이에서 뭔가가 톡 하고 튀어나왔다. 몸을 던져 지켜준 시몬 덕분에 무사히 서류산사태라는 참극을 피한 부타였다. 키탄은 어리둥절히 두리번거리는 부타에게 엎어진 시몬을 가리킨 뒤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어영차 서류뭉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서류의 무게에 조금 비틀거리면서도 휘적휘적 씩씩하게 총사령관 집무실을 나섰다.


총사령관의 집무실은 무척이나 넓다. 너비도 너비거니와 천장도 까마득하게 높고, 전면은 유리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카미나 시티의 전경이 훤히 보인다. 고소공포증이나 광장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몇 발짝 걷다 말고 오금이 저려 주저앉아 버릴 정도다. 오랜 세월 지하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환경이었지만 지상에서 간멘들과 싸우며 생활해 왔고, 육전∙해전∙공중전 등 각종 험난한 전투를 겪어낸 대그렌단 출신들은 오히려 그 넓이와 높이를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 경향이 특히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이락과 키드였다. 때문에 총사령관 집무실을 찾을 때마다 조금 소란스러운 것이 상례였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 움큼 정도 되는 작은 꽃다발을 앞세워 들어오던 아이락이 멈칫 발을 멈추자 뒤따라오던 키드가 미처 그에 맞추지 못하고 아이락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키드가 뭐라고 투덜거리자 아이락이 입가에 집게손가락을 세웠다. 고개를 갸웃거리다 안쪽을 살펴본 키드는 이내 수긍하며 입을 다물고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서류 너머로 보이는 시몬이 제대로 앉아 있는 상태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빤딱 고개를 들어 아는 체를 하는 부타와 인사를 마치고, 책상 위에 엎어져 사람이 들어오든 말든 미동도 하지 않는 시몬의 등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확인한 아이락은 꽃다발을 내려놓으려다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래도 사람 주변에는 어느 정도 공간이 확보되어 있지만 서류로 점철된 책상 위는 매우 옹색했다. 평소부터 책상 하나만 덜렁 놓여 있을 뿐인 집무실의 살풍경함을 지적해 왔던 아이락은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 꽃병이라도 없나 서랍을 뒤져 보려던 키드는 필연적으로 시몬을 건드리게 되는 탓에 부타의 철벽 수비에 막혀 두 손 들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모처럼의 꽃다발을 어디 바닥에다 던져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잠시 얼굴을 맞대고 소곤거린 아이락과 키드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곤 두 팔을 걷어붙였다. 부타에게 꽃다발을 맡긴 아이락은 가능한 한 종류에 맞춰 서류를 나누기 시작했고, 키드는 그것을 받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쏟아진 상태와 정리된 상태의 차이는 천지차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처럼 쓰러트리지만 않으면 적당한 높이로 쌓아두는 것이 일의 처리 면에서도, 공간 활용 면에서도 효과적이다. 결과적으로 시몬 밑에 깔린 몇 장을 제외하고 말끔히 정리된 책상은 상당한 여유가 생겼다. 본래 어른 하나가 드러누워도 될 만한 넓이고, 서류더미를 빠듯하게 양쪽으로 몰아놓은 결과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꽃다발을 놓을 장소는 여전히 애매했다. 시몬이 종종 창가 앞에 드러눕기도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근처에 적당히 내던져 두었다간 깐깐한 보좌관이나 직무에 충실한 미화원에게 쓰레기 취급을 받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는 꽃이니까 그렇게까지 융통성 없게 굴지는 않겠지만 낙관적으로만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다.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던 아이락은 부타가 줄기 하나를 꺼내 빙빙 돌리며 노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며 빼앗으려다 팟 하고 뇌리를 스친 발상에 손가락을 딱 튕겼다. 파트너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챈 키드가 힐쭉 웃는다. 한동안 부석거리고 나서 다음번엔 아예 화분으로 하거나 꽃병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두 사람이 떠난 뒤, 부타는 솜씨 좋게 엮여 시몬의 머리 위에 얹힌 화관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희미하게 풍겨오는 향기가 이미 선객이 다녀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향기다. 그래, 얼마 전 키얄이 태교에 좋다며 사온 허브 화분이 은은하게 흘려보내던 상쾌한 향기와 닮아 있다. 심신 안정의 효과도 있다던가. 이런 사소한 배려를 할 수 있는 건 아이락일까 하며 발길을 옮긴 다야카는 향기의 출처가 시몬의 머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반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책상과 맞닿아 있는 남색 머리칼을 장식하고 있는 연보랏빛 작은 꽃이 그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어서다. 평소의 인상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감상이다.

본인이 들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시몬은 체격이 썩 우람하다고는 할 수 없는 편이다. 그리 왜소한 편도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발육이 부진한 면이 있었다. 아마 필요 이상으로 건장하게는 될 수 없는 체질일 것이다. 몇 년 전엔가 간신히 니아의 키를 추월했을 때는 대그렌단의 멤버 모두가 기뻐하며 대견스러워 했을 정도다. 어쨌거나 성장기를 거치면서 쑥쑥 자란 시몬은 충분히 평균적인 체형을 갖추고 있다. 굴착꾼에 이은 간멘 조종사 출신이라 기초 체력도 강하고, 로시우의 제안으로 호신술도 익힌 터라 만만히 보고 덤벼들다간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속사정이 어쨌든 간에 야무지거나 굳세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거기에 내심 연하인 로시우보다 키나 체격으로 뒤지는 것을 은근히 분해한다는 것을 다야카를 비롯한 연장자들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도 어릴 적엔 비슷한 고민을 한 경험이 있으니까다. 게다가 지금도 시몬과 대그렌단의 마음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17세에서 멈춰져 있는 카미나와 지금의 시몬을 비교하면 아무리 추억 속에서 미화되었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카미나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골격 자체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시몬으로서는 유감이라고 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를 미묘한 문제일 것이다.

잘 자는 아이는 키가 큰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다.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격려해 줘야 할까? 다야카는 가지고 온 물건을 시몬의 손가락이 닿을까 말까한 장소에 놓으며 슬며시 쓴웃음을 지었다. 편안한 휴식을 위한 필수품이라며 키요가 직접 만들어 준 부타 모양 쿠션이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기왕이면 머리 밑에 괴여 주고 싶지만 잘못 건드려 깨우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어쩌면 지금 시몬의 팔을 베고 느긋하게 자고 있는 부타 전용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래서 좋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타는 영원의 소년이다.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여느 때처럼 불을 붙이지 않는 담배를 꼬나물고 덜렁덜렁 들어온 조시는 다야카를 보고 멀거니 손을 흔들며 다가오다 힐끗 책상을 보고 푸핫 웃었다. 다야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다야카가 입을 틀어막았던 것과 같은 이유겠지만 미처 참지 못한 건 아마 다야카가 추가해 놓은 쿠션 탓도 있을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누르느라 헙 하고 아래턱을 끌어올려 윗입술을 덮은 조시는 쿠션과 화관과 부타와 다야카를 차례로 훑어보다가 역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끅끅거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의아해하던 다야카는 조시가 꺼낸 물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톤톤간멘스모용 다이그렌이었다. 얼마 전 이벤트 한정 상품으로 나온 희귀품이다. 일단 전함이기 때문에 보통 톤톤간멘스모에서는 쓰이지 않지만 앞으로 기획되어 있는 다이간도, 다이간카이, 다이간텐 등의 전함 시리즈가 활성화되면 함대전이 열릴 수도 있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참이다. 평소에 톤톤간멘스모에 관심이 없는 다야카를 비롯해 대그렌단의 누구나가 이 다이그렌을 가지고 싶어 했지만 무작위 추첨 10개에 당첨되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은 확률이었다. 나중에 그걸 안 아텐보로와 테츠칸은 제작사 측에서 자문을 구해왔을 때 교환조건을 걸어야 했다고 억울해했다. 그것을 지금 조시가 가지고 온 것이다. 상당히 갖고 싶어 하는 눈초리의 다야카를 무시하고 다이그렌을 쿠션 위에 올려놓은 조시는 마치 동화의 나라 같다고 중얼거리며 또 웃었다.

그 표현에 무심코 동의하던 다야카는 다음 순간 흠칫 놀랐다. 조시가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카메라를 꺼낸 것이다. 당황하며 말리려는 다야카보다 한 발 빨리 셔터를 누른 조시는 잔소리 많고 시끄러운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얼른 나가자며 잽싸게 줄행랑을 쳤다. 삽시간에 당한 일이라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린 다야카는 속으로 시몬에게 사과하며 도망치듯 발길을 돌렸다.


지상에는 하늘이 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만질 수 없는 파란 하늘에서는 지하에 살던 시절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갖가지 모양들이 마치 마술처럼 일어난다. 그것도 매일.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는 태양. 날마다 모습이 바뀌는 달. 빠르게 혹은 느긋하게 흘러가는 바람과 구름. 새까만 허공에서 반짝이는 별. 하늘은 항상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땅 속에서는 존재도 몰랐던 다양한 물건들을 접하게 된 이유들 중에는 항시 바뀌는 날씨라는 현상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비를 막는 우산이라든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라든가, 과도한 햇빛을 차단하는 화장품이라든가, 벼락을 피하기 위한 피뢰침이라든가. 또한 속속 발굴되는 고대문명의 유물들도 생활용품의 다양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어떤 물건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것은 실제로 써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필요에 의해 개발한 상품이거나, 사용설명서가 같이 발굴되거나 하는 경우에는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쉽게 풀리는 문제지만 정확한 용도도 모르는 채 무작정 시험해 보다가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신정부는 발굴한 물건은 물론 개발하거나 응용한 물건에 대해서도 우선적으로 정부에 신고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얽매이기 귀찮아하는 족속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끼리끼리 모인다고 자기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물건을 주고받는 유동적인 집단을 만들어 내는 일도 종종 있다. 쉽게 말하면 풍물암시장과 같은 장소로, 아직 로제놈이 지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부터 지상과 지하를 넘나다니며 위험과 모험이 가득한 삶을 영위하던 이들이 주도하는 별세상이다.

죠간과 바린보에게 있어서 그러한 암시장에 다니는 것은 일종의 취미 생활이었다. 예전에야 어쨌든 현재 신정부의 요직에 앉아 있는 이상 위법으로 분류되는 경우엔 단속해야 할 입장이지만 자각이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 일단 그들이 물건을 입수해 오면 그것을 검사할 수 있고, 여차하면 시장 자체를 급습할 수도 있기에 누군가의 명에 의해 묵인되고 있다는 것을 쌍둥이 형제 자신은 모르는 일일 것이다.

어쨌든 시찰을 핑계 삼아 암시장에 나가곤 하는 쌍둥이는 다양한 물건을 구입해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을 좋아했다. 암시장이란 이름에서 칙칙하거나 구질구질한 잡동사니를 연상하면 안 된다. 별의별 물건들이 모여드는 이 시장은 연대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낡은 물건에서부터 최첨단 기기들까지 다루고 있으며, 최신 유행의 집합소 혹은 유행을 만들어내는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쌍둥이의 선물이 퇴짜를 맞은 적은 거의 없었다. 옷이든, 장식품이든, 부엌용품이든, 정말 정체도 모를 골동품이든 간에 말이다. 간혹 총사령관 최신 사진집 - 그것도 비밀스런 영상이 특전으로 붙어 있는 - 같은 것을 집어왔다가 잘못 걸리는 바람에 대대적인 단속바람을 일으킨 적도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성과가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의기양양하게 전리품을 거머쥐고 총사령관의 집무실을 찾은 죠간과 바린보는 먼저 다녀간 이들이 조성해 놓은 분위기를 보곤 씨익 웃었다. 그리곤 주섬주섬 물건을 꺼내 빈 공간에 늘어놓는다. 그 와중에 부타가 부스스 눈을 떴지만 한 번 기웃 두 번 갸웃 하더니 도로 잠들어 버렸다. 평상시의 그들답지 않게 얌전한 동작으로 배치를 마친 죠간과 바린보는 마지막으로 가볍게 스위치를 눌렀다. 투명하고 동그란 세계 속에 별이 내리면서 부드러운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죠간과 바린보는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 이번엔 작은 쌍둥이에게 선물을 건네기 위해 집무실을 나섰다.


반나절 정도 자리를 비운 동안 생긴 변화는 예상 내이기도 하고, 전혀 예상 밖이기도 했다. 반듯하게 정리되어, 하는 김에 높이도 얼마간 낮아진 서류더미. 사이좋게 본 적이 없는 쿠션을 함께 베고 있는 남색 머리와 갈색의 돼지두더지. 한 쪽 머리 위엔 청초한 향기가 나는 화관. 다른 한 쪽이 껴안고 있는 것은 톤톤간멘스모용 다이그렌. 끊임없이 자잘한 별을 뿜어내는 스노우볼에서 흘러나온 음악소리가 그들을 감싸듯이 잔잔히 퍼진다. 로시우는 잠시 책상 주변에 구축된 평온함을 음미하다가 들고 온 자료를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그대로 시선을 돌린 로시우는 유리창 너머의 카미나 시티를 내다보았다. 이 도시를 상징하는 거대한 동상이 기분 좋게 빗속의 샤워를 즐기고 있었다. 사흘째 계속된 비다. 정기적으로 닦고 있으니 그리 쌓이진 않았겠지만 지난번 청소 이후 묵은 때가 깔끔히 쓸려갔을 것이다.

몇 명이나 다녀간 걸까. 로시우는 가만히 주위를 관찰하며 가늠해 보았다. 한 명, 두 명, 세 명… 아마 적어도 다섯 명 이상. 연일 비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인지 여느 때보다 많은 편이다. 로시우는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언제였는지 눈치를 챘을 땐 이미 시작되어 있었던 습관은 어느 틈엔가 변칙적이면서도 확고하게 정착되어 머지않아 사라질 거라는 로시우의 예상과는 달리 지금껏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슬슬 잊어버리지 않았나 싶어도 언제나 누군가 한 명 쯤은 반드시 지킨다. 지금의 거의 조건 반사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항상 얼굴을 맞대는 사이다 보니 다른 정부 요원들은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로시우가 유난을 느끼는 것은 거기에 명확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만큼 초기와는 형태도 표현도 많이 달라졌지만 기본 원칙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로시우는 책상 한 구석에 몰려 있는 서류더미에 손을 올리며 나지막한 숨을 토했다. 이 자리에까지 올 필요가 없는 서류들을 이렇게 바리바리 쌓아둔 자신 또한 비뚤어졌으나마 그 규칙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래 이런 시기에 시몬의 작업 능률이 평소보다 떨어진다는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은 로시우 본인이다. 시간을 확인하고 앞으로 남은 여유분을 계산한다. 언제부터 자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구태여 일으킬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낸 로시우는 아기자기하게 책상 위를 점령하고 있는 물건들을 치우려다 마음을 바꿨다. 아직 누군가가 더 올지도 모른다. 더 늘어날지 어떨지는 불확실하지만 정리한다면 한 번에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로시우가 서류 더미 하나를 그러안고 다시 자리를 뜬 뒤, 살며시 쿠션에서 얼굴을 올린 시몬과 부타가 시선을 맞추고 장난스럽게 웃은 것은 그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시몬과 놀자. 그것은 아직 시몬이 니아보다 작았던 무렵부터 암암리에 시작된 습관. 누가 강요하는 것도 뭣도 아니었지만 언제부턴가 절대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초자율적인 대그렌단의 불문법.

by 벽효-아리수 | 2007/09/20 06:55 | ★ 패러디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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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스이나 at 2007/09/20 08:35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안녕하세요 아리수님 그동안 눈팅하다 리플 답니다! 25화를 본 후 이 소설을 읽으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대그렌단 사람들의 생활이 너무 아기자기하고 사람다워서 좋아요. 시몬 최신 사진집이라니 어떤 건지 꽤 궁금하구요!!=//=17화에서 로시우가 시몬에게 결제부탁하는 서류들이 다 동사무소에서나 나올법한 건의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고의였군요 푸하하하하ㅠㅠ아리수님의 필력은 언제나 최고십니다ㅠ///////////////////////ㅠ 소설 재밌게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벽효-아리수 at 2007/09/20 20:44
안녕하세요, 스이나님. 댓글이 가뭄에 콩 나듯 하다 보니 뒤늦게 발견하고 진짜야? 하고 흠칫 놀랐답니다. 리플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쓸쓸히 땅을 긁고(...) 있었는데 덕분에 용기가 생겼어요. ^.^ 대그렌단의 멤버들이 비록 정부라는 조직 속에선 무능했을지라도 시몬의 든든한 가족과 같은 존재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시몬 사진집은 로시우가 정부 예산 비상금을 확보 겸 취미생활의 일환으로 비공식 발매를 허가하고 있는 거겠지요. 게릴라 사이에선 정보 수집을 핑계삼아 인기대폭발일 겁니다.
Commented by 오거 at 2007/10/14 03:06
이 글을 읽고 나니까 비로소 죽은 그렌단원들에게 정이 갑니다.
아이쿠... ㅠㅠ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ㅜㅜ
Commented by 벽효-아리수 at 2007/10/15 12:57
그렌단 애들은 뭐라 해도 인간미라고 할까, 본능이라고 할까, 그런 것에 충실한 아이들이니까요. 저로선 시몬을 이뻐해 준다면 OK라는 기분도 있습니다만. ^^ 좋은 글이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새벽 at 2009/12/18 02:25
처음뵙겠습니다! 어쩌다가 아주 최근에 그렌라간을 보게 되었는데 이런 보배로운 글을ㅠㅠ 위에서 부터 찬찬히 읽어 올 때 부터도 좋았지만 마지막 비가 오는 날엔 시몬과 놀자는 문장에서 쿵 했답니다. 카미나가 죽고 나서 8화 마지막부터 줄기차게 내렸던 비가 생각 나서요. 그 때 당시에는 모두다 카미나의 죽음에 자기 자신도 추스리기 힘들어서 시몬을 내팽겨 둘 수 밖에 없었지만 여유를 찾은 지금에 와서는 왠지 그때 시몬을 위로해 주지 못했던 멤버들의 마음이 비가 오는날에 놀자,는 형태로 사과하고 있는게 아닌가 해서요;;; 앗 다른 분의 글에 너무 함부로 해석하고 있나요ㅠ 어떤 의도로 쓰신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겐 그렇게 받아 들여졌답니다ㅠ 아무튼 좋은 글 감사합니다ㅠㅠㅠㅠ
Commented by 벽효-아리수 at 2009/12/19 08:49
안녕하세요.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렌라간 보고 계시군요. 멋진 작품이죠. ^^ 이 글을 쓴 의도는 생각하신 대로입니다. 25화를 보고 주체할 수 없는 기분으로 후다닥 쓴 거라서요, 대그렌단이 시몬을 귀여해 주는 걸 보고 싶었답니다. 3부는 너무 짧아서 일상의 아기자기함이 전혀 없으니까요. 아니, 그거야 작품 전체에 해당하기도 하지만요. ^^;; 평소보다 조금 시몬의 기분이 가라앉을 수 있는 강한 비가 내리는 날에는 모두 아닌 척 모른 척 하면서 핑계거리를 가지고 시몬의 얼굴을 보러 오는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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