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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돌파 그렌라간] 豚 鼴 之 夢

이따금 희박해진다

 

부산하게 울리던 발소리가 멀어져 간다. 꽤 위험했지만 들키지 않고 넘어간 것 같다. 마음을 놓은 순간 한껏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반사적으로 힘이 빠졌다. 저도 모르게 풀려버린 다리로는 맥없이 내려앉는 몸을 지탱하기에 역부족이었고, 결국 중력에 따라 부스스 주저앉았다. 피부에 닿은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이 남의 것인 양 무덤덤하게 퍼져나간다.

때때로 감각을 잃는다. 망막에는 분명히 사물이 비치고 있는데 그에 대한 현실감이 없다고 할까. 그것이 심해지면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뜨고 있는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단단히 다져진 바닥을 딛고 있는데도 부드러운 진흙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고, 전신을 강타하는 강풍 속에서 사방이 투명한 벽으로 막혀 있는 듯한 기묘한 갑갑함을 느낄 때도 있다. 탁 트인 푸른 하늘 아래서 환히 내리치는 햇빛을 받고 있음에도 어쩐지 결코 손에 닿지 않는 환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아득함과 공허함이 엷은 안개처럼 스며들곤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혹시 꿈일 지도 모른다.

감각이 사라질 때마다 그렇게 생각한다. 지상에서, 그것도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꿈이고, 사실은 지금도 어두운 지하에서 흙먼지와 돌조각과 부대끼며 벽과 천정의 좁은 틈 사이에서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아닌지. 눈을 뜨면 오늘도 내일도 지진과 낙석을 두려워하는 막막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는 건 아닌지. 누구에게 물어볼 수 있을까.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현실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다는 것인가.

거대한 얼굴이 떨어진 꿈. 지상으로 나가는 꿈. 태양과 달과 별을 보는 꿈. 간멘이라 불리는 메카에 공격당하는 꿈. 생존을 위해 싸우는 꿈. 여행하는 꿈. 같은 처지의 이들과 결집하는 꿈. 끔직한 희생을 치루는 꿈. 결국 지상의 세계를 손에 넣는 꿈. 지하로부터 끊임없이 올라오는 사람들의 꿈.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건물과 넓어지는 거리의 꿈. 멀거니 앉아있다간 금세 뒤처지고 마는,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급격한 변화의 중심에 있는 꿈. 뒤쫓아 오는 발소리를 피해 구석에 숨어 멍하니 꿈을 되새기는 꿈.

지상에서 지하의 꿈을 꾸는가, 지하에서 지상의 꿈을 꾸는가.

꿈이라는 것은 자는 동안 뇌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시각적 심성이다.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환상의 세계. 물론 무의식의 작용이라 해도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전혀 본 적도 없는 것을 꾸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귀동냥으로 들었을 뿐인 지상에 대한 막연하고 단편적인 정보를 가지고 이렇게 방대한 꿈을 꿀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상상력의 발휘라고 설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는 기억의 단편이거나 유체이탈을 통한 간접 체험일 수도 있다.

얄궂은 일이지만 이것이 꿈이라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을 수긍할 수 있다. 제멋대로 가지를 뻗어나간 꿈은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다.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는 일도 없다. 때문에 조금도 바라지 않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마 그렇기에…….

흘러간 시간, 지나버린 과거, 돌아오지 않는 잃어버린 이.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역시 이 지상에서의 생활이 현실이라는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인가. 딱히 지금의 생활에 불만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끔 이렇게 꿈과 현실이 마구 뒤섞여 세계가 헝클어지는 듯한 애매함에 휩싸인다. 무엇이 꿈이었는지, 무엇인 현실이었는지, 어느 쪽을 원하고 어느 쪽을 선택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불안한 것은 아니다. 쓸쓸한 것도 아니다. 그저 시야와 의식이 몽롱해지며 자신이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 의심스러워질 뿐이다.

“찾았다. 여기에 있었구나.”

그리고 이러한 모호함을 단숨에 깨트려 주는 것은 항상 이 목소리.

“이런, 난 들어갈 수가 없겠는데. 손은 들어가려나?”

빠듯한 틈새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등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손. 다정한 손놀림. 옛날에 비하면 형태도 크기도 다소 바뀌었지만 이 온기와 다정함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부러 그 온기를 피해 구석으로 틀어박혀 본다. 왜냐하면….

“니아의 간식 뺏어먹은 것에 대해서 더 이상 화내지 않으니까.”

온화한 목소리가 산들바람을 탄 솜털처럼 하늘하늘 내려앉았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자 반 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 앞머리를 흩뜨린 채로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소리 자체는 적당히 안정되어 있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희미하게 기복이 있고, 가슴에 늘어진 코어 드릴에도 작지 않은 흔들림이 남아 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틀어박히고서 상당 시간 지났던가. 그동안 줄곧 찾아다녔던 걸까.

“잊어서 미안. 다음번엔 부타 몫도 준비해 둘게.”

어딘지 모르게 애교와 곤란함이 섞인 어르는 말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발이 움직였다. 익숙한 체취와 체온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 틈에가 달려들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저기가 본래 있을 자리, 나의 자리니까. 그래, 사실은 당신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 까마득한 지하 시절부터 전혀 변하지 않는 이 몸이 꿈이든 현실이든 그 무엇이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내가 나를 지각하는 건 당신의 소리에 의함이며, 나에게 접하는 당신의 온기가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 당신이 있어 주면 언제라도 그것이 현실.

오늘도 나는 시몬의 어깨 위에 앉아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시몬과 같은 세계를 본다.

by 벽효-아리수 | 2007/09/19 13:39 | ★ 패러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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