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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돌파 그렌라간] 박살내 주마

리더의 귀환. 그렌단의 부활.

마지막까지 버티던 무간이 화려한 불꽃과 함께 소멸한 것을 확인한 킹키탄이 린카네 형무소 쪽으로 진로를 잡자 다른 간멘들도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아래 도로에선 레이테의 트럭이 다야카이저를 실은 채 저만치 앞서서 덜컹덜컹 달려가고 있다.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키탄은 힘차게 조종간을 당겼다. 목적지가 눈앞이다. 감옥이라는 특성상 카미나 시티 제일의 견고함을 자랑하는 린카네 형무소는 외곽에 위치한 덕에 무간떼들의 집중공격지에서 조금 벗어나 있어 군데군데 손상을 입긴 했지만 비교적 멀쩡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킹키탄은 형무소 상공을 한 바퀴 돌고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감옥의 유일한 출입구 앞으로 내려갔다. 거기엔 이미 레이테의 트럭이 한 발 앞서 정차해 있었다.

형무소는 인기척 하나 없이 싸늘했다. 이미 여기도 대피는 끝난 상태다. 아크그렌이 지상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신정부는 모든 수용소를 개방할 것을 전했다. 누구의 지시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조금이라도 길게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의 표출이리라. 중범죄자 수용소인 린카네 형무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급박한 순간에 자기 목숨보다 죄수들을 챙기는 쪽을 중요시 할 간수가 있을 거란 기대는 현실적으로 무리였고, 실제 거리에서 우왕좌왕하는 간수 하나를 붙잡아 윽박질러 본 결과 열쇠 꾸러미만 던져두고 왔다는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죄질이 나빠 격리 중인 죄수들은 대개 방치됐을 거라는 사실과 함께. 현재 사상 최악의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는 시몬이 어디쯤 있을지 짐작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킹키탄의 해치를 연 키탄은 차례로 내려오는 현직 전직 동료들을 확인하곤 머리를 긁적였다. 거의 장식물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명색이 신정부의 간부들이다. 우선적으로 아크그렌에 탈 수 있었는데도 게으름을 피우며 빈둥거리다 킹키탄이 날아오르자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뛰쳐나온 바보들의 얼굴이 어째 평소보다 생기발랄했다. 웃음이 나온다. 문득 변변한 반항 한 번 없이 형무소행 비행기에 오른 시몬의 뒷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 때의 사정이 어땠던지 간에 자신이 그를 도울 수 없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렌단이 부활한 이상 리더는 싫어도 이 바보들의 앞에 서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심정 같아서는 직접 꺼내주고 싶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요코가 간 이상 여기서 맞이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키탄은 코어 드릴을 하늘 높이 던졌다가 잡아챈 후 홀가분한 동작으로 형무소 문 앞에 뛰어내렸다. 언제나 마이페이스인 레이테가 안경을 번뜩이며 늦었다는 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뒤이어 조시가, 키드가, 아이락이, 막켄이, 바린보와 죠간 등등이 스트레스가 확 풀린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그 시절의 모든 이들이 모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렌단 초기부터 최전선에서 함께 뛰던 멤버들이다. 키탄은 어깨를 으쓱이곤 문 앞에 떡 버티고 섰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귀에 거슬리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형무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손안의 물건이 새삼 묵직해지는 것이 소유자가 돌아왔다는 실감이 솟아오른다. 키탄은 인력에 끌리듯 주저 없이 코어 드릴을 던졌다.

자칫하면 얼굴에 박힐 기세로 날아온 코어 드릴을 가볍게 받아낸 시몬은 문 앞에 쭉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던 무리를 보고 잠깐 놀란 것 같더니 이내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것이 이 사태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보는 시몬의 웃는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키탄은 왠지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억지로 누르며 활짝 가슴을 폈다. 대그렌단 리더의 귀환이다.

“근무 수고.”

시몬은 돌려받은 코어 드릴을 꽉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총사령관으로서의 일은 이걸로 끝이다. 이제부턴 그렌단의 리더 시몬이 나설 차례다. 엉뚱하게도 의외의 인물, 아니 수인이 함께여서 한 두 마디 놀라움과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시몬의 차분한 한 마디로 이의는 금세 수그러들었다. 하긴 따질 여유 따윈 없다. 당면한 문제는 지금부터 어떻게 움직일까 하는 것이지만 감옥 속에 있던 시몬이 사태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던 덕분에 결론은 순식간에 나왔다.

“얘들아! 지금부터 저 커다란 천장을 박살내자!”

잠시 하늘로 시선을 올린 멤버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렌단의 목표는 언제나 간단명료하고 단순명쾌했다. 머리 위에 벽이 있다면 부수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연락조차 없었던 요코가 돌아왔고, 시몬이 체포된 후 어느 틈엔가 행방불명되었던 부타도 어디선가 부다다다 뛰어 나타났다. 일단 모일 수 있는 멤버는 모두 집결한 셈이다. 7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는 크기를 유지하고 있는 부타는 처음엔 눈물을 글썽이며 시몬의 가슴에 달려들었지만 요코가 있는 것을 눈치채자 눈곱만큼의 주저도 없이 그 풍만한 가슴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리운 광경에 그렌단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다.

“그런데 키탄, 그렌라간은?”

“엑?”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 기세를 동강 끊어낸 것은 요코였다. 키탄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다들 자기 간멘은 가지고 온 것 같지만 수감되었던 시몬의 그렌라간은 어떻게 했어?”

주위를 둘러보며 거기에 있는 간멘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요코가 다시 물었다. 타당하다면 타당한 의문이다. 그렌라간 없이 달을 부순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멤버들의 기세가 단번에 추락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지명된 키탄은 누구 대신해 줄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렸지만 다들 머쓱한 얼굴로 발뺌하기 바빴다. 여기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은 키탄 밖에 없다는 태도들이다. 어쩐지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시몬과 눈이 마주친 키탄은 무간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에도 흘리지 않았던 식은땀을 대량으로 방출해버렸다.

“음, 그러니까… 일단 폐기 결정이 나긴 했는데…….”

“폐기? 아, 사형수의 기체다 이거군.”

“괘, 괜찮아! 아직 있을 거야. 며칠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파손 부분을 수리했는지는 잘 모르고, 이 난리 통에 무사하다면…의 이야기지만.”

“잠깐, 그게 어디가 괜찮아.”

“한심한 놈들이군. 빼돌릴 생각 정도 못 하냐.”

요코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고, 비랄이 자기 일인 양 눈살을 찌푸린다. 허나 정작 당사자인 시몬은 태연하게 웃고만 있었다. 뭔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 양옆의 키드와 막켄을 쿡쿡 찔러가며 쭈뼛쭈뼛 시몬의 눈치를 살피던 키탄은 그 시선이 자신이 아니 그 뒤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후광이 비치고 있다. 시몬이 보고 있던 건 다름 아닌 레이테였다. 키탄의 눈에는 엄지를 치켜들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레이테가 정말로 구원의 여신처럼 보였다.

“그렌라간, 준비되어 있어.”

“어?”

“정말?”

“정말로?”

“진짜야?”

“어디에?”

지금껏 죽은 듯이 찌그러져 있던 멤버들의 귀가 번뜩 열렸다 싶더니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레이테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흠칫 놀란 막켄이 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치 사탕에 우르르 달려드는 개미떼 같다. 시커먼 아저씨들이 달려드니 옆에서 보기엔 어떻건 당한 입장에선 별로 유쾌하지 못할 텐데도 레이테는 한 치의 동요 없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달 탐사 간멘 발사장이야. 어차피 달까지 가야 하잖아?”

“굉장해!”

“굉장해!”

“과연 레이테!”

“누님 최고야!”

“다행이다….”

다들 신나서 들썩이는 가운데 키탄은 혼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키탄의 어깨를 요코가 탁탁 두드리더니 윙크를 남기며 지나간다. 알아줘서 고맙다, 요코…하며 내심 눈물짓던 키탄은 그녀가 레이테에게 트럭을 가리키며 뭔가를 묻는 걸 보고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재차 인식했다.

“좋아, 당장 출발이다!”

“출발이다!”

호기롭게 복창한 멤버들이 와-하고 흩어지며 자신의 간멘을 향해 달려갔다. 그걸 멍청히 보고 있던 시몬과 비랄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거의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이테가 따라오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1인승인 간멘의 조종석은 여유 공간이 그다지 넓지 않다. 누군가와 함께 타기보다는 트럭 신세를 지는 쪽이 훨씬 낫다.

“시몬.”

레이테를 따라 걷기 시작한 시몬과 비랄이 동시에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킹키탄으로 가다 말고 180도 반전해 시몬의 뒤를 쫓아온 키탄은 잠시 우물거리다 자기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시몬의 머리에 손을 턱 올려놓았다. 사실 이 녀석은 아직도 이렇게 작다. 그런데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일 큰 짐을 떠안겨줄 수 밖에 없다. 갑자기 말이 막힌다. 키탄은 시몬의 머리 위에 얹은 손에 힘을 담는 것으로 심장에 압박을 가해 겨우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꺼낼 수 있었던 말은 결국 하나 뿐이었다.

“고생했다.”

시몬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똑바로 키탄을 비추는 눈동자는 구름 하나 없는 밤하늘처럼 맑고 뚜렷했다. 어지럽게 돌변하는 상황에 끌려 다니기 급급해 전전긍긍하던 자신들과는 달리 기묘하리만큼 담담히 재판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사라져 갔을 때의 희미한 인상은 흔적도 없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옛날 키탄이 대그렌단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키탄은 그 의지에 다시 운명을 걸었다.

“부탁한다, 리더.”

“맡겨 둬.”

시몬은 싱긋 웃으며 수긍했다. 키탄 역시 씨익 웃더니 시몬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한 번 비벼주고 킹키탄을 향해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조금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넘긴 시몬은 뭔가 굉장히 해괴한 걸 봤다는 표정의 비랄을 눈치채곤 괜히 헛기침을 하더니 얼른 몸을 돌렸다. 이미 간멘들은 하나 둘씩 발진하기 시작했다. 트럭을 향해 발길을 서두르려는 찰나, 레이테의 트럭에서 기동한 다야카이저가 쌩 하고 날아오더니 비랄과 시몬을 덥석 붙잡아 트럭 위로 내던졌다.

“쌓인 얘기는 나중에 하랬지. 우물쭈물하지 마.”

다야카이저에서 흘러나온 건 요코의 목소리였다. 시몬이 눈을 깜박이며 확인했다.

“요코? 다야카이저에 탄 거야?”

“그래. 지금은 탈 사람도 없다니까 딱 좋지.”

“이봐, 여자! 무슨 짓이야!”

“시끄럽네. 너희가 꾸물대고 있으니까야.”

“그렇다고 내던지냐! 난 짐이 아니야!”

“탈옥수는 짐칸으로 충분해.”

“개방 지시가 있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탈옥이 아니잖아.”

바락대는 비랄과 한데 엮어 짐 취급을 받는 시몬이 내던져졌을 때 부딪친 팔을 문지르며 요코의 말을 정정했다. 그렇지만 요코의 귀에는 여름날 모기소리와 같았던 모양이다.

“어차피 감옥에서 썩느라 몸이 무뎌졌을 거 아냐. 준비운동으론 딱 좋지 뭘 그래.”

“여기에 앉아 가라고? 넓긴 하지만 잡을 데도 제대로 없… 으아앗.”

돌연 예고도 없이 트럭이 출발했다. 그 바람에 혀를 깨물어버린 시몬은 허둥지둥 운전석 쪽에 매달리며 외쳤다.

“기다려, 레이테! 하다못해 운전석으로 옮겨 탈 때까지 기다려줘!”

“뒤쳐지는 건 싫거든. 벌써 탔으니까 거기서 드라이브나 즐기셔.”

“너무해!”

“이, 이 여자들이…….”

미처 자세를 잡지 못한 비랄은 덜거덕 구르다 간신히 가장자리를 붙잡고 기어 올라오며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쾌적함과는 거리가 먼 짐칸의 승차감은 최악이었지만 레이테는 호쾌하게 페달을 밟았다. 멈출 생각은 톱니바퀴의 기름때만큼도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뒤따라 발진한 킹키탄이 트럭 주위에서 슬그머니 맴돌다가 시몬이 시선을 돌리기 전에 얼른 상공으로 날아오른다. 무자비하게 덜컹거리는 트럭에 필사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시몬과 비랄이 조금 안 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트럭과 보조를 맞추기도 어렵거니와 오늘 제일의 공로자라 할 수 있는 요코와 레이테가 하는 일에 차마 끼어들 담력이 없는 것이다. 키탄은 속으로 명복을 비는 것으로 조금 따끔거리는 양심을 달래기로 했다. 그 때 요코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키탄, 발사장은 멀어?”

키탄은 카미나 시티의 지도를 꺼내 다야카이저의 화면으로 전송하며 대답했다.

“방위상으론 형무소와 정반대에 있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서두르자. 아크그렌이 위험해.”

“뭐?”

“떨어지는 건 달 하나가 아니라는 얘기야.”

요코의 말은 흡사 폭탄이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은 키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설마 대기권 밖에? 그럼 아크그렌은 함정에 걸린 거야?”

“그런 셈이지.”

다음 순간 통신 회선이 일시에 시끄러워졌다. 전 채널 오픈 통신인 탓이다. 안 그래도 급박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새로운 정보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조금씩 커졌다. 그 중에서 단연 두드러진 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키탄이었다.

“안 돼! 키요와 키논과 키얄과 안네가 타고 있는데! 그 망할 무간놈들이이이!!”

“안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키탄이 결혼이라도 했나 한 요코가 의아하게 되묻자 동시다발적으로 뜬 화면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해설이 쏟아졌다.

“요코는 모르겠구나. 안네는 다야카와 키요의 딸이야.”

“얼마 전에 태어난 신생아인데, 엄마를 닮아서 엄청 귀여워. 분명히 커서 미인이 될 걸.”

“불쌍한 다야카. 키탄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빠졌구만.”

“시스콤 처형을 가진 자의 불행이지.”

“빠졌군.”

“불행이지.”

오픈 통신의 좋은 점은 하나하나 묻지 않아도 다양한 정보가 알아서 들어온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반대로 듣지 않아도 좋은 정보까지 들어온다는 단점도 있지만 그런 건 알아서 거르는 수밖에 없다. 화면에 뜨진 않았지만 이 통신 회선은 레이테와도 연결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시몬과 비랄만 따돌림을 받는 상황이 되었지만 이미 시몬이 알고 있을 사항이니까 별 문제 없을 것이다. 요코는 한때 다야카이저의 조종사였던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 따뜻한 감개에 젖었다.

“그래, 키요와 다야카의 아이가 태어났구나.”

“청첩장을 보내려고 했는데 네 소재를 알 수가 없어서 말이지.”

“키요가 엄청 아쉬워했어.”

“다야카, 좋은 아빠가 되겠지.”

“시스콤 키탄이 인정했을 정도니까 그 점은 보증문서야.”

“시스콤!”

“시스콤!”

“시끄러!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아니, 키요의 남편이 아무래도 좋은 건 아니지만! 어이, 너희들, 좀 더 속도를 내! 얼른 아크그렌을 구하러 가야지!”

킹키탄이 키탄의 성량만큼이나 화르륵 불타오르는 기합으로 맹스피드로 날아가자 다들 그에 따라 속도를 올렸다. 사태의 심각성이 더욱 심해진 만큼 굉장한 기백이다. 그렇지만 한 번 터진 통신 회선의, 정보교환을 가장한 잡담은 끊어질 줄 모르고 이어졌다.

“아크그렌은 어디까지 가 있으려나.”

“지휘는 로시우가 하는 건가? 다야카가 함장이라면 좋을 텐데.”

“맞아, 다이그렌 시절의 다야카의 지휘는 꽤 괜찮았지.”

“그래도 그건 무리일 걸. 그 녀석, 사표 내서 지금 백수 신세라고.”

“다이그렌의 브리지 요원들은 대부분 아크그렌에 있잖아. 대형 전함을 타 본 경험이 있는 건 그 녀석들 정도니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리론이 있잖아. 키논도 분명 브리지에 있겠지? 잘 하고 있을 거야.”

분분히 나오는 의견들로 통신 회선이 가득 찬다. 아크그렌에 탄 이들이 분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았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전투요원이기에 전함을 움직이는 일에는 별 도움을 줄 수 없다. 조종사의 가치는 사용할 수 있는 기체가 존재해야만 100% 이상으로 발휘되는 것이다. 그것을 실감하고 있는 아이락이 조종간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간멘이 남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러자 다들 얼굴을 마주보더니 너나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펄의 실용화로 나선왕의 유산인 간멘을 폐기하자는 안이 나온 것은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간멘을 타는 것에 생의 보람을 느끼고 있던 그렌단 출신들이 반발했지만 그라펄 부대가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간멘을 가뿐히 제압한 것을 계기로 결국 폐기안은 통과되었다. 인류 해방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그렌라간을 제외하면 현재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간멘은 하나도 없다. 정확히는 없어야 한다. 그 간멘이 지금 멀쩡하게 하늘을 날며 무간과 싸우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꽤 이상한 일이었다.

“어, 놀랐어. 설마 레이테가 맡아서 보관하고 있었을 줄은.”

키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감탄했다.

“시몬은 별로 놀라지 않은 것 같던데.”

조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제시한다. 바린보와 죠간이 멍하니 그랬나? 하고 기억을 뒤집는다. 회선이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원래 좀 멍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라서 그런 거 아냐?”

“멍청아. 이런 상황에서는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 녀석이란 걸 잊었냐?”

“좋은 간멘 조종사는 하나라도 더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였고.”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걸까?”

“무간의 습격을? 달이 지옥의 사자가 된다는 로제놈의 유언 말이야?”

“그런 거 말고, 간멘이 남아 있을 거라는 거.”

“간멘 폐기안에 최종적으로 사인한 건 시몬이잖아.”

“총사령관이니까 당연하지. 로제놈의 유언을 신경써서 그라펄 개발을 주도한 건 로시우였지 않아? 간멘 폐기를 제안한 것도 로시우고.”

거기서 레이테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그거, 말해 두는데 폐기 공장으로 우리 쪽을 고른 건 리론이고, 폐기 책임자로 리론을 지명한 건 시몬이었어.”

“음.”

화면 한 구석에서 막켄이 짧고 무게 있게 긍정한다.

“…뭔가 된통 당한 기분이구만.”

그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키탄이 재차 회화에 참전했다. 속도를 내는 것으로 초조함을 대충 다스렸는지 얼굴은 여전히 분기탱천이지만 억양은 꽤 안정적으로 돌아와 있다. 레이테는 새로운 담배를 꺼내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어쨌든 지금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좋잖아?”

“하여간 뭘 생각하는지 통 알 수 없을 때가 있다니까.”

“법무국장이면서 모르는 것 투성이구나, 키탄.”

옆에서 요코가 정곡을 찌른다. 키탄은 무심코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픈데 찌르지 마, 요코.”

나오느니 한숨이다. 키탄은 머리를 흔들어 한숨을 떨쳐냈다.

“그렇지만 뭐, 우리가 무능했다는 건 인정해야겠지. 처음에는 그래도 할 일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밥벌레로 전락해 버렸으니까.”

말투가 거의 탄식조다. 분위기가 약간 무거워졌다. 조시도, 키드도, 아이락도, 바린보와 죠간도 뭔가 웅얼웅얼 투덜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자각은 다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찌감치 정부를 떠났던 레이테와 막켄, 요코는 저마다 생각하는 바가 있는 표정으로 키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귀찮은 건 전부 로시우나 시몬에게 떠넘기고 나 몰라라 했으니 로시우가 우릴 못 믿고 혼자 알아서 하려고 한 것도 어쩔 수 없지. 때려 부수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주제에 사람들 위에 서는 정부 관리라니 분수에 안 맞는 출세였어. 솔직히 적성은 전혀 안 맞았지만 몸이 편하다 보니 점점 늘어지더군.”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싸움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여 도시를 세우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신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간부들의 생활은 점점 윤택해졌다. 성가신 사무 처리는 할 수 있는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적당히 결재나 하면서 빈둥빈둥 놀아도 천하의 대그렌단에게 뭐랄 사람은 없었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쓸모없는 사람이 늘어져 있어도 유능한 누군가가 위에서 이끌어 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인망을 잃어가고, 새로운 세력이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시몬의 재판 때였다. 로시우는 의견을 구하지도, 정보를 공유하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알려하지 않고 나태하게 평화에 잠겨 있는 동안 정부 요인으로서의 발판은 산산이 부서졌다. 정말 한심스러운 노릇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인 건 아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꽤 가라앉아 버렸지만 처음 키탄이 정부에 남기로 결심했던 것은 떨어질 떡고물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거기엔 그렌단의 리더가, 시몬이 있었다. 신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되어 버린 그 작은 아이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7년 전, 카미나가 죽은 후 그렌단의 리더가 된 키탄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던 시몬을 한 번 포기했다. 끌어올릴 자신도 없었고, 시몬 자체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다들 자기 감정을 추스르는데 벅차 카미나의 죽음으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 시몬이라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라간과 합체하지 못한 그렌으로는 전력이 떨어졌지만 카미나가 없는 그렌라간은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렌라간이 없는 그렌단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상당히 취약했고 결국 적의 함정에 고스란히 빠지고 말았다. 절체절명이었다. 그 위기를 구한 것은 리더였던 키탄이 아니다. 키탄이 버리고, 모두가 잊고 있던 시몬이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혼자 일어선 그 뒷모습을 보며 키탄은 자신이 한없이 작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런 자신이 시몬을 작은 아이라 부르는 건 어폐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리 강해도 시몬이 어린애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낯선 자리에서 어색해하는 아이를 함께 싸우던 때와 같이 조금이라도 뒷받침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 힘들 때 도와주지 못한 속죄도 겸해서.

다시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시몬은 시커먼 덩어리 정도로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어두운 방구석에 틀어박혀 음침하게 드릴을 돌려대던 시몬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도통 생각이 안 난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당시의 시몬을 똑바로 보고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카미나를 전혀 모르는 니아 정도일 것이다. 아니, 한 사람 더 있을 지도 모른다. 카미나의 그렌을 물려받았던 그 녀석이.

로시우. 시몬보다도 어린 그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책임은 실로 무겁다. 100%는 안 되더라도 결코 제로를 만들지 않기 위한 결정. 키탄은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로시우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과, 그러한 결단을 도저히 흉내낼 수 없지만 말없이 따를 수도 없는 자신을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밖에 없게 된 로시우를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껍질 밖에 남지 않는 간부직을 박차고, 안락의 그늘에서 나와 버렸다. 수많은 인명을 책임지는 건 무리고, 적절한 대안 하나 내놓을 수 없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건 할 수 있다. 그리고 키탄은 그렌단으로서 그렌단의 리더를 선택했다. 또 의지해 버리는 게 좀 미안하지만 믿어주는 것이 자신의 힘이 된다고 한 건 시몬이니까 괜찮을 거다.

시몬은 로시우를 원망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키탄에겐 확신이 있었다. 코어 드릴이 없다고 해도 구멍파기 시몬이 마음만 먹었다면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시몬은 지금까지 그 감옥 속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었다. 그저 감정대로 악을 쓰다 맥없이 찌그러져 명색 뿐인 법무국장 권한이나마 어떻게 활용해 감형 내지 사면시킬 수 없을까 궁리하는 게 고작이던 자신과는 달리 시몬은 처음부터 로시우를 믿고 있었다는 얘기다. 로시우의 판단과 결정을 믿고, 세계를 맡기려고 한 것이다. 믿는다는 것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시몬이니까. 누구든지 모든 것을 완벽히 할 수는 없다. 빈틈이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다. 시몬도, 로시우도, 키탄도. 그러니까 뭉친다. 서로를 믿고 돕는다.

키탄은 몰수한 코어 드릴을 목에 걸고 있었던 로시우를 생각했다. 완전히 여유를 잃은 그 초췌한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 한 구석이 시큰거렸다. 로시우가 지금도 시몬을 믿고 있을 지는 장담할 수 없다. 자신들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옛날에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해도 코어 드릴을 내줄 때의 그 표정이 아직 마음 깊은 곳에 그렌단이 남아 있다고 외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로시우가 신정부의 리더로서 그렌단이 할 수 없는 것을 한다면, 로시우가 할 수 없는 것은 그렌단이 하면 된다. 방법이 달라도 추구하는 목적은 어차피 같은 것이다.

“정부 관료로서는 무능했지만 그렌단이 되면 얘기가 달라!”

키탄이 상념을 떨쳐버리며 기운차게 단언하자 좀 잠잠해졌던 통신 회선들이 파하하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우리는 무적의 그렌단!”

“빨리 안 가면 로시우가 대머리 되고 말 걸.”

“그래, 그 녀석 나이도 어린데 이마가 점점 벗겨지는 게 불쌍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요 며칠 동안 팍삭 늙었더라고.”

“밥이나 제대로 먹었을까 몰라. 위장도 좀 걱정되는데.”

“적어도 남은 머리카락은 우리가 지켜주자.”

키탄의 말에 다들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다 그렇지만 불평불만이야 이겨서 살아남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게다가 원래 단순한 머리들이라 큰 일이 닥치면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지라. 요코는 저도 모르게 한숨 섞인 웃음을 흘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가지는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부서진 건물 사이로 미처 대피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망연히 주저앉아 하늘을, 달을 올려보는 이들도 있었다. 미안하지만 도와줄 시간이 없다. 그들의 눈엔 맹렬히 하늘을 나는 간멘이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도로는 곳곳이 파괴되고 그 파편이나 건물의 잔해가 사방에 널려 있어 최악의 노면 상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냥 걷는 것도 꽤 어려운 상황이니, 안 그래도 승차감 나쁜 트럭의 짐칸 위는 굉장할 것이다. 가슴 속의 부타가 같이 내려다보며 낮은 소리로 부부거린다. 요코는 트럭 위를 굴러다니며 뭐라 뭐라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는 시몬과 비랄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런데 키탄,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뭐야.”

“남는 간멘, 있어?”

“…비랄 녀석 말이로군.”

침묵은 긍정이다. 키탄은 레이테를 불렀다.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있어. 내 공장에 키얄이 타던 녀석이.”

“키야룬가 말이지. 있는 건 좋지만… 저 녀석에게 줄 만한 물건은 아니야.”

조금 생각하던 키탄은 딱 잘라 말했다. 귀여운 동생이 타던 기체를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에게 주고 싶지 않다는 것과, 비랄의 실력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성능이 딸릴 거라는 점 두 가지가 미묘하게 혼합된 대답이다. 그 심정을 이해한 요코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약간 돌린다.

“그 동안 그렌엔 누군가 탔었어?”

“아니. 정세가 안정되면서 그렌라간 자체가 출동할 일도 점점 줄어들다 보니.”

“로시우는 완전히 정치에 전념하고, 달리와 기미가 경험삼아 두어 번 탄 적이 있지만 그 외엔 없을 걸.”

“어쩌다 움직일 일이 있으면 시몬이 혼자서 탔어. 라간은 원래 시몬이 아니면 움직이지도 않으니까.”

키드와 아이락이 키탄의 뒤를 이어 말하자 조시가 킬킬거리며 덧붙였다.

“그라펄대 애송이들이 그렌라간을 움직여 보겠다고 덤벼들다가 코가 석 자는 빠진 적도 있었지. 아무나 탈 수 있다고 얕본 대가는 톡톡히 치렀을 거야.”

“그냥 시몬이 타는 라간에 한 번 타 보고 싶었던 애들도 있었던 것 같지만.”

“맞아 맞아. 있었어. 시몬 숭배하던 애들이. 그런데 이젠 그라펄 하나씩 꿰찼다고 그렌라간을 고물 취급하더라. 실제로 싸우는 걸 별로 못 봤으니 별 수 없겠지만 나 처음 알았을 땐 좀 화났다구.”

그들의 말 속엔 그렌라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여 있었다. 라간의 조종은 시몬 밖에 할 수 없으니 처음부터 논외지만, 그렌의 조종사는 또 다른 차원에 있다. 카미나의 간멘이었던 그렌. 카미나가 생을 마친 그렌. 시몬의 파트너이기도 한 그렌의 조종사는 그렌단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몬이 아니더라도 어중이떠중이를 태울 마음은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랄은 좋든 나쁘든 그렌과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렌은 현재 조종사가 없고, 비랄의 실력에 어울리는 다른 간멘도 없는 형편이다. 거기에 시몬은 비랄을 간멘의 조종사로서 소개했다. 그런 사실들을 전부 맞춰보면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였다.

“그럼 비랄은 역시….”

“그래, 그렌에 타겠지.”

모두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것이 분명한 말이 되어 나타나자 통신 화면의 얼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괜찮겠어?”

요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키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요코.”

“아… 그런가.”

자신을 염려하는 말에 깜짝 놀란 요코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시몬과 비랄은 엉망으로 망가진 도로를 가차 없이 돌파해 가며 우당탕쿵탕 질주하는 트럭 위에서 여전히 티격태격대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사이좋은 친구처럼 보이는 광경이다.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오른다. 이성이 억지로 납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수긍하고 있다. 시몬이 비랄의 수갑을 풀어줄 때부터 그럴 거란 예감도 있었다. 요코는 입가에 웃음을 띠운 채 말했다.

“난, 괜찮아.”

“그러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키탄이 힐쭉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시몬이 선택했다면 나도 불만은 없어. 난 시몬에게 내일을 걸었으니까.”

이어 키탄은 화면을 쭉 훑어보며 물었다.

“어이, 너희들은?”

“없어.”

“나도.”

“이하동문.”

“시몬이 하겠다고 하면 우리 의견이 뭐 씨알이나 먹히겠어.”

조금 퉁명스럽거나 왠지 무뚝뚝하거나 뭔가 체념이 섞여 있긴 했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쌍둥이 형제도 동의의 뜻으로 발 구르는 소리를 냈다. 키탄은 요코에게 시선을 돌리며 양 팔을 펼쳐 보였다.

“보다시피.”

“바보들이라니까.”

요코가 상쾌하게 웃는다. 키탄도 쓴웃음을 지었다.

“뭐, 좀 복잡하긴 하지. 비랄은 반란분자 중에서도 엄청 끈질긴 녀석이었으니까. 시몬도 개인적으로 신경쓰는 상대였고. 네가 떠나고 난 뒤에도 여러 가지 있었다고. 로시우 책상엔 비랄 관련 자료가 몇 상자는 쌓여있어.”

사실 체제가 완전히 안정되기 전까지 간멘을 탈 수 있는 간부들도 최전선에서 계속 뛰어다녔다. 그라펄이 개발되기 전엔 간멘으로 어지간한 사건에 전부 대처해야 했다. 수인 측의 게릴라는 물론이고, 간멘을 빼앗아 난동을 부리는 인간들의 숫자도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강하고 끈질긴 것이 비랄이었다. 키탄도 몇 번인가 대면했고, 그 때마다 왕창 깨졌다. 그 때의 쓰라린 추억을 떠올린 키탄의 미간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겼다. 시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뼈저리게 체험했던 순간들이다. 뒤집어 말하면 시몬을 보조할 수 있는 건 비랄 정도라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말이야, 비랄 녀석도 쌓인 게 많지 않을까? 저 녀석의 상관을 나선왕까지 넷이나 보내버렸잖아, 우리들.”

키드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건 잊고 있었던 멤버들이 아차 하며 손바닥을 친다.

“그랬지, 참.”

“얼마 전엔 체포해서 감옥에도 보냈고. 엔키두두 박살내 버렸지, 아마?”

“하긴, 다른 간멘이라면 몰라도 그렌이 되면 좀 심란하겠는데.”

“악연이지?”

“악연일걸.”

“저 녀석… 탈까?”

아이락의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미 시몬에게 가세한 판이니 가능성은 있다. 또한 간멘 조종사라면 뛰어난 기체에 타 보고 싶은 욕망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을 몇 번이나 패배시킨, 숙적이라 칭하는 그렌라간이 되면 어떨까. 비랄 본인이 아닌 이상 그 속을 완전히 짐작하는 것은 무리지만….

“탈 거라는 데 돼지두더지 스테이크 5인분 건다.”

툭 조시가 떡밥을 던졌다.

“나는 10인분!”

“나는 15인분!”

돼지두더지 스테이크 애호가인 바린보와 죠간이 반색을 하며 대롱대롱 걸려들었다. 이어서 20인분이라니 30인분이라니 40인분이라니 하며 돼지두더지 스테이크가 순식간에 통신 회선을 점령했다. 돼지두더지 스테이크엔 흥미 없는 요코가 라이플 탄환을 걸고, 레이테는 공구상자를 들어 올려 보였다. 키탄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으며 중재에 들어갔다.

“그래서야 내기가 되지 않잖아. 안 타는 쪽에 걸 녀석은 없냐?”

없었다. 키탄은 혀를 차며 돼지두더지 스테이크 행진에 동참했다.

그렇게 웃으며 떠드는 동안 발사장에 도착했다. 시몬과 비랄도 겨우 트럭 짐칸에서 해방되었다. 다소 해쓱했던 안색은 그렌라간과 마주한 순간 바로 생생해졌다. 발사장에서는 로켓 간멘과 번쩍번쩍 광이 나는 그렌라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렌라간이 얼마나 손상되어 있었는지를 아는 키탄과 시몬이 감탄사를 터트릴 정도로 그렌라간의 준비는 완벽했다. 출력도 올려 두었다니 금상첨화다. 발사 로켓부터 모든 것을 리론이 수배해 둔 것이라고 하니, 그 세심한 배려에는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없었다면 다들 지상에서 손가락이나 빨며 달이 떨어지길 기다려야 했을 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렌단의 천재 메카닉 만세다. 그래도 감사는 만났을 때 하기로 하자. 레이테의 지시에 따라 모두 힘을 합쳐 분주하게 로켓 발사 준비를 시작했다.

로켓 간멘에 킹키탄을 연결하던 키탄은 그렌라간 앞에서 시몬과 비랄이 머리를 맞대어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을 보고 역시나 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자다. 남색과 상아색의 머리가 붙어있으니 배색적인 면에선 제법 어울리는군,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요코가 다야카이저채로 재촉하러 갔다. 커다란 포구가 떠억 입을 벌리고 다가오니 보통이라면 오금이 저릴 상황일 텐데 시몬과 비랄은 태연하게 알았다며 손을 저었다. 의외로 닮은 타입인지도 모르겠다. 부타가 요코의 가슴을 떠나 시몬의 머리 위로 껑충 자리를 옮겼다. 하긴 부타도 라간의 고정멤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대로 비랄이 그렌에 올라탔다. 키탄은 다른 멤버들이 왁왁거리는 소음을 배경으로 한가로이 손가락을 꼽아보며 뒷일을 생각했다. 100인분을 거뜬히 넘어가는 돼지두더지 스테이크는 시몬 앞으로 달아놓자. 다들 시몬을 믿고 건 거니까. 우선은 우주다.

레이테의 전송을 받으며 지상을 출발한 그렌라간과 로켓 간멘은 엄청난 압력을 견뎌내고 대기권을 돌파했다. 새하얗던 시야가 새까맣게 물든다. 지상에서 보던 하늘과는 전혀 다르게 펼쳐진 우주 저 멀리에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한눈에 다 들어오지 못할 만큼 거대한 무간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크그렌이 연못 위에 뜬 종이배처럼 보일 정도다. 그 주위에 콩알처럼 산재해 있는 것은 필시 처음으로 나타났던 무간들일 것이다. 굉장한 숫자다. 그라펄대가 응전하고 있지만 수적인 열세는 명백했다. 아크그렌 위로 대형 무간 하나가 위협적으로 진입해 들어온다. 이미 어딘가 피해를 입은 듯 아크그렌의 움직임엔 기민함이 없었다. 어쩌면 단념한 걸까. 그 때 그렌라간이 팔을 쭉 뻗으며 외쳤다.

“포기하지 마! 로시우!”

그렌라간의 드릴이 힘차게 돌아가며 뿜어 나온 녹색의 광선이 아크그렌을 덮치려던 대형 무간을 밀어냈다. 로시우의 놀란 소리가, 브리지의 동요가 전해져 왔다.

“포기하면 거기서 끝이야! 잊은 거냐, 이 드릴이 하늘을 뚫는 드릴이라는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그렌라간은 아크그렌을 등 뒤로 돌리고 적의 정면에 버티고 섰다.

“비랄, 그걸 하자!”

“그거? 그것도 좋지.”

전 우주로 퍼져 나가는 시몬과 비랄의 소리가, 특히 비랄 쪽이 어째 좀 들뜬 것처럼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공격을 하려는 거라기엔 어딘가 낌새가 다르다고 느낀 순간, 핏 하고 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강렬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인간과 짐승 두 개의 길이 비틀려 얽혀가는 나선도!”

“어제의 적으로 운명을 부수고 내일로 가는 길을 이 손으로 만든다!”

“숙명합체! 그렌라간!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처음인 것 같지 않게 호흡이 잘 맞는다. 과연 질긴 인연은 폼이 아니라는 건가. 역시 그렌라간의 출진은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흥이 나질 않는다. 멋진 여유에 배짱이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즉흥인지는 몰라도 사실 대기권을 돌파하는 동안 둘이 뭔가를 속닥거리고 있었다는 걸 아는 키탄은 속으로 조금 웃었다. 가슴이 들썩인다. 피가 끓는다.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시몬이 믿는 비랄을 믿고, 시몬을 믿는 자신을 믿자. 내가 믿는 나를 믿는 거다. 키탄은 마음 한 구석에 조금 남아 있던 불안감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시야를 온통 메우고 있는 무간들을 쏘아보았다. 이것이 대그렌단이다. 귀여운 여동생들과 조카딸에게 손가락 하나 닿게 할까 보냐. 잘 봐라, 안티 스파이럴. 절망적인 상황의 돌파야말로 그렌단의 특기 중의 특기. 반격 개시다.


…그런데 시몬, 너 그 녀석이랑 계속 같이 놀 거면 성량 좀 키우는 게 좋겠다.

by 벽효-아리수 | 2007/08/24 12:00 | ★ 패러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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