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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신연의] 10주년 기념 10제 - 2. 사숙(師叔)

출처 : 봉신연의 동맹

 


 

처음 불쏘시개를 털어놓은 것은 옥정진인이었다. 거기에 통천교주가 불씨를 던졌고 이어 원시천존이 기름을 부었으며 마지막으로 태상노군이 크게 바람을 부쳐주었다. 10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삼대선인의 연계는 최강도사 신공표를 무보수 노동력으로 부려먹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이 빨간 상자입니까?”

“아니군.”

“그럼 이 파란 문갑입니까?”

“그것도 아니고.”

“그럼 이 노란 주머니입니까?”

“아무래도 다른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신공표는 꽝 판정을 받은 물건들을 차례로 한쪽으로 치웠다. 빨간 상자는 건곤권처럼 날아가 건너편 절벽에 박혔다. 파란 문갑은 화첨창처럼 예리하게 솟구쳐 반대편의 바위를 분쇄했다. 노란 주머니는 풍화륜처럼 회오리를 일으키며 떠올라 아득한 상공에서 장렬히 파열했다. 옥정진인은 자신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착실하게 깎여나가는 주변지형을 보면서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섞이면 곤란하니까요. 문제 있습니까?”

간결하게 답한 신공표는 다시 사방에 널려 있는 집채만 한 무더기들을 뒤엎기 시작했다. 언뜻 냇가에서 돌덩이를 들추어 게나 가재를 찾는 행동과도 닮았지만 규모가 너무 달랐다. 그가 지나간 뒤는 마치 거대한 빙하가 고속으로 흘러내린 계곡과 같이 무자비하게 침식되어 속살을 드러냈고, 간혹 들어 올리거나 치우기 여의치 않은 거물은 벌집마냥 슝슝 구멍을 뚫려 격멸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그렇게 해서 발굴된 녹색 사물함 속에서는 다종다양한 아령이 산사태를 일으킬 기세로 굴러 나왔다. 다음에 끄집어낸 보라색 금고에서는 접촉식으로 설정된 지향성 지뢰가 터져 나와 수천 개의 쇠구슬을 분사하였다. 그 와중에 위에서 떨어진 주황색 보따리에서는 수상쩍은 연기가 술술 새어나오더니 유기물 무기물 가릴 것 없이 들러붙어 보글보글 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떠한 것도 혼백체인 옥정진인과 최강이라 칭송되는 신공표에겐 통하지 않았지만 그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기엔 넉넉한 위력이었다.

아령과 지뢰와 거품이 산란하는 가운데 갈색 반닫이를 앞에 둔 옥정진인은 곤혹스레 입을 열었다.

“신공표, 나는 계란형의 진주색 구체가 들어간 검은 육각함을 찾고 있다고 말한 바 있지만…….”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무의미한 확인 작업은 무엇이지?”

“위험물 제거작업 겸 헛수고를 빙자한 놀이입니다.”

언제나 도화사의 포커페이스를 잊지 않는 신공표는 오늘도 방싯방싯 웃어보였다. 흑점호가 곁에 있었다면 겉과 속을 발라낸 명료한 해설을 들려주었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지금 백학동자와 흑학동자를 동반하고 옥정진인이 기척을 감지할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당연히 흑점호의 촌철살인적인 중얼거림도 옥정진인의 귀에는 이르지 않았다. 대신 옥정진인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감상을 말했다.

“나에겐 단순한 화풀이로 보이는군.”

“그렇게 보인다면 무언가 켕기는 게 있다는 거겠지요.”

옥정진인은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군. 짚이는 곳이 없어.”

신공표의 손아귀에 잡힌 분홍색 공이 무수한 가시를 분출하며 우그러졌지만 옥정진인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쁜지는 모르지만 애꿎은 물건을 상대로 분을 푸는 것은 자중해 주지 않겠는가. 원래 이곳은 잔해더미이고 세월이 흐르면 풍화하기 마련이지만 인위적인 자취를 너무 남기면 곤란해.”

“봉래도까지 소문이 나면 일부러 나를 사용한 보람이 없어질 테니까요.”

“그렇지. 그러니까 부탁하네.”

옥정진인은 진중하게 수긍했다. 잠시 먼 곳을 바라본 신공표는 넝마쪽이 된 공을 멀리 내던졌다.

“야유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군요.”

“뭔가 잘못되었나?”

“됐습니다.”

“혹시 삼대선인에게 놀아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던 건가?”

신공표는 말없이 진로를 방해하는 보패합금 폐기물 덩어리를 박살냈다. 의뢰인은 어디까지나 삼대선인이지 옥정진인이 아닌 것이다. 다시 한 번 힘차게 팔을 휘두른 신공표는 폐기물 덩어리가 가루가 된 후에야 험하게 뿌려대던 기색을 찬찬히 거둬들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무로건곤망을 사용하면 되돌릴 수 있다고 발뺌하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원시천존과 통천교주만이라면 모를까 태상노군이 나태수트까지 벗고 맨정신 맨몸으로 나타난 것에 놀란 나머지 무심코 대답을 한 게 최대의 패인이다. 그리고 삼대선인의 의뢰에는 가급적 흔적을 남기지 않고 처리할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망을 보고 있는 흑점호에게서 연락은 없다. 신공표는 끝도 없이 펼쳐진 산과 별의 잔해더미를 헤집으며 투덜거렸다.

“정말로 본의가 아니지만 어쩔 수 없군요. 설마 게으름의 화신과 같은 태상노군까지 나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대체 그는 언제부터 신계에 있었습니까?”

“모르네. 나도 원시천존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태상노군이 계신 것을 보고 꽤 놀랐지.”

“하긴 그 사람이 가려고만 생각하면 얼마든지 갈 수 있으니까요.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 뻔뻔하고 음흉한 영감이 통천교주의 부탁에 이 나를 끌어들일 만큼 의욕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신공표는 한 손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싸악 저어보였다.

“나태한 태상노군과는 달리 원시천존은 철저하게 왕혁과 손을 잡고 봉신계획을 준비하여 실행한 사람이지요. 물론 태상노군의 꿈은 여와와 연결된 것이었고, 그가 견지한 태도의 많은 부분이 계산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만. 함께 봉신계획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는 삼대선인이면서도 사실 통천교주는 진실에서 멀어져 있었던 거죠. 결과 아들과 생이별을 경험하고 달기의 1차적인 표적이 되어 마음이 부서진 채로 봉신되었습니다. 원시천존도 태상노군도 그에 대해 최소한의 양심이랄지, 죄의식 정도는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지도 모르지.”

말투는 좋지 않지만 사실을 근거로 구성된 독설엔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옥정진인은 한 때 옥허궁이 자리 잡고 있던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곤륜산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던 옥허궁은 금오도와 충돌했을 때 제일 먼저 부서진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분들에게는 그 분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고, 또한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이유가 있습니까?”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야. 다만 내가 만나본 통천교주는 너그러운 동시에 매우 강직한 분이셨네. 설령 천지가 뒤바뀌고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려도 스스로가 존재하는 의미를 잃지 않을 듯한. 그렇기에 원시천존님도 태상노군도 그 분의 그러한 부분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일리는 있군요. 만일 원시천존과 통천교주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봉신계획은 중간에 좌초하고 말았겠지요. 무사히 끝났다 해도 워낙에 집념이 강한 영감이라 끝까지 복수하려 들었을 테고.”

옥정진인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신공표는 팔짱을 끼고 탄식하듯 말했다.

“정말 반응이 재미없네요, 당신은.”

“그런가.”

“봉래도의 새로운 교주 선출에 그런 죄의식이 조금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소문에도 흥미가 없을 것 같고요.”

순간 옥정진인의 표정에 자그마한 파문이 일었다.

“어디서 그런 말이 나오고 있나?”

부지불식간에 목소리도 단단해진다.

“양전의 교주 취임에 삼대선인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이건 효과가 있군요. 역시 화제로는 아이가 좋다고 재확인했습니다.”

“신공표!”

“농담입니다.”

신공표는 바지자락에 걸린 아령 하나를 탁 털어냈다. 자두알 크기의 아령이 반투명한 옥정진인을 빠져나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비탈길을 굴러 내려간다. 탕, 탕, 탕 하고 시간을 재던 신공표는 눈매가 변한 채인 옥정진인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봉래도의 교주는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실력으로나 태생으로나 성장으로나 통합된 선인계에 양전 이상으로 어울리는 교주는 없으니까요. 삼대선인의 결정은 충분히 객관적입니다. 불평하는 세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면전에서 토로할 용기도 없는 자들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지금의 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는 얼마 없어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확실하게 위해를 줄 수 있는 당사자가 말하기엔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지만 그만큼 진실미가 있다. 옥정진인은 일순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절로 큰 숨이 나왔다.

양전이 교주가 된 것은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소거법의 결과였다. 잃어버린 곤륜산과 금오도를 대신할 새로운 선인계, 봉래도의 교주는 원시천존과 통천교주의 전례에 비춰 슈퍼보패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결정사항이었다. 슈퍼보패의 소유자는 일곱 명. 그 중 여와와의 최종결전에서 사망 처리된 태공망이나 표표히 흘러가는 태상노군, 일찍부터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신공표는 처음부터 논외였다. 곤륜 원로들의 지지를 받은 연등도인은 교주가 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문중의 심복이라는 인상이 강했던 장규는 좌중을 압도할 만한 힘이 약했고, 나타는 다른 이의 위에 설 능력이 의문시되었다.

남은 것은 양전 뿐이었다. 통천교주의 아들로 곤륜에서 자라 봉신계획에서 태공망의 보좌 겸 대리로 활약한 그의 이름은 인간, 요괴 할 것 없이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실제 여와를 쓰러트린 후 신속하고 적확하게 사태를 정리한 것은 다름 아닌 양전이었다. 태공망이 부재였고 원시천존은 요양을 핑계 삼아 조직의 통솔에서 손을 뗀 9개월간 곤륜산과 금오도의 생존자를 수습했던 경험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연등도인의 천거와 삼대선인의 인가, 운소세자매를 위시한 다수의 선인들의 찬동을 얻은 양전은 당황하면서도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현재, 봉래도는 무난히 전진을 시작하였다.

“물론 그는 이제 200년을 넘긴, 어리다고도 할 수 있는 젊은 요선입니다. 미숙한 면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지요. 그러나 앞으로의 가능성을 가지는 그 젊음은 여와의 세례를 받지 않은 세대를 상징합니다. 지금의 미숙한 점은 주변의 나잇살 먹은 보좌들이 뒷받침하면 될 일이고요.”

“연등도 장규도 신공표 당신보다는 젊을 테지만.”

조용히 경청하던 옥정진인이 살짝 중얼거렸다. 최초의 선인 태상노군의 제자인 신공표는 이미 5000년 이상을 살아왔다. 배분으로 보면 선인계의 창시자 원시천존의 제자인 옥정진인과 동급이라기보다 사숙에 가까운 항렬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공표는 못 들은 체 말을 이었다. 노인의 귀는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 주워 담는 법이다.

“삼대선인을 비롯해 혼백체가 된 곤륜십이선과 금오십천군, 문중이나 연등도인, 여기 있는 나도 포함한 지난 세대의 선인들에게 더 이상 눈에 띄는 성장은 없겠지만 양전은 다릅니다.”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들여 요정-요얼-요선의 단계를 거치는 요괴에게 있어 200년은 병아리 걸음마 수준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다. 양전을 기다리는 시간과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신공표는 복희와의 재전 외에도 은밀히 기대하고 있는 훗날의 예상을 짐짓 가볍게 입에 담았다.

“그는 언젠가 이 별에서 태어난 생명체 중 가장 시조에 가까운 존재가 되겠지요.”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예정된 것인지 바뀐 것인지는 떠나서.

희미하게 덧붙인 말을 들었는지 옥정진인은 신묘한 얼굴이 되었다.

“두개골 형태는 원시천존님이 제일 가깝지 않을까.”

신공표의 손에서 뇌공편이 뚝 떨어졌다.

“지금 그 말 농담입니까?”

옥정진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지긋하게 관찰했지만 그 이외의 감정을 발견하지 못한 신공표는 헛웃음을 흘리며 등을 돌렸다.

“일이나 마저 끝냅시다.”

문득 그 등에 진지한 기쁨이 서린 음성이 닿았다.

“그 아이가 말이지……. 멋진 미래로군.”

생각보다 생각 외의 반응을 하는 인물이었다. 괜스레 어깨를 들었다 내린 신공표는 기분을 고치고 옥정진인의 안내에 따라 재차 탐색작업에 나섰다.

곤륜산맥과 금오열도의 잔해는 추락 당시에 비하면 부피가 다소 줄어 있다. 곤륜산2나 생존한 선인들의 일시적인 거주지 건축재료로 사용된 부분도 있거니와 봉래도로 이사하면서 대대적인 정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온전한 물건 외에도 향후 인간계에 남겨두어선 안 될 선인계의 기술들은 파편까지 엄중히 수거되거나 처분되었다. 허나 수천 년에 걸쳐 쌓아올린 양대 선인계의 문명은 하루아침에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집단적인 문화유산 외에도 개개인이 남긴 유물 또한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데다 선인의 오랜 수명 탓에 제작한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위험물이 어디에 잠복해 있을지 몰라 앞으로도 시간을 들여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군요?”

대략적인 장소는 원시천존이 스캐닝한 지도를 토대로 옥정진인이 유추해 놓은 터였다. 지시에 따라 군말 없이 굴을 파고 갱도를 세운 신공표는 반나절이 지난 후 비틀어진 책상서랍 속에서 목적한 물건을 찾아냈다.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검은색 육각함을 확인한 옥정진인은 적이 감탄했다.

“과연 유적탐색과 발굴의 프로. 삼대선인이 입을 모아 추천할 만하군.”

“먼저 훑어봤을 양반들이 할 소리는 아니군요.”

“어쨌든 고맙네, 신공표. 옥천산이 청봉산과 건원산과 종남산 밑에 묻히지 않았으면 백학과 흑학에게 꺼내는 것도 부탁할 수 있었는데 수고를 끼쳤군.”

“확실히 도덕진군과 태을진인과 운중자의 협력공격이 되면 어지간한 도사로는 버틸 수 없겠지요.”

신공표는 육각함을 들지 않은 다른 팔의 손목을 한 번 꺾었다. 뇌공편의 세 갈래 자편이 빙글빙글 원을 그리자 신공표가 지금껏 파헤친 자리가 단번에 붕괴되었다. 동시에 여전히 위험물을 토해내고 있던 청봉산과 건원산과 종남산도 와르르 무너지며 옥천산을 완전하게 덮어버렸다. 비바람이 몇 번 몰아치고 나면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은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다소 거친 증거인멸 작업을 마친 신공표는 흑점호에게 신호를 보내고 새삼 육각함을 살펴보았다. 크기는 대략 오광석 정도이고 무게는 그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래서? 이건 뭡니까?”

“원시천존님께 듣지 않았는가?”

“그 능구렁이 노인네라면 태상노군과 통천교주를 등에 업고 그냥 물건을 하나 찾아 달라 공갈을 놓았을 뿐입니다. 뭐, 얼추 짐작은 갑니다만.”

신공표는 육각함과 함께 서랍에서 꺼낸 사진 몇 장을 펼쳐보였다. 작고 작은 양전이 웃거나 화내거나 놀라는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옥정진인은 만감이 깃든 눈으로 사진을 바라보았다.

“나도 오랜만에 보는군. 분명 뿔을 완전히 감출 수 있게 된 다음에 찍은 사진이야. 저렇게 작았던 아이가 지금은 선인계의 교주라니, 참 많이 컸지.”

“그러니까 이 육각함의 내용물은 통천교주에 대한 선물이군요.”

“맞아, 양전의 성장기록이네.”

“그것도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쪽으로 말이지요.”

고개를 끄덕인 옥정진인은 선기를 담아 함을 어루만졌다. 선기가 함을 완전히 감싸자 이음새라곤 보이지 않던 육각함의 뚜껑이 딸깍 열리더니 소리 없이 변형했다. 이윽고 두 쌍의 검은 날개가 달린 계란형의 구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옥정진인이 손가락을 퉁기자 구체는 부드럽게 활개를 치며 날아올랐다.

“그 아이에게도 비밀로 하고 언젠가 통천교주에게 보여줄 날이 오길 바라며 기록해 둔 것이지. 밝고 건강한 모습을 담으려 노력했던지라 울고 있는 모습을 남겨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더 이상 양전이 울지 않게 되었을 무렵이었던가.”

옥정진인은 나비처럼 나긋나긋하게 주변을 도는 구체를 바라보며 옛 추억을 더듬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통천교주에게 양전의 옛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있자니 퍼뜩 생각이 나더군. 찍어둔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양전은 이것의 존재를 정말로 모르나요?”

“존재는 아네. 단순한 조명 정도로만 알고 있지. 나의 선기로 인증하지 않으면 기동하지 않기도 하고.”

“내용물을 볼 수 있습니까?”

“함께 신계까지 가 주겠다는 말이군?”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일어난 소박한 호기심으로 물은 신공표는 예상외의 회답에 눈을 끔뻑 감았다 떴다. 옥정진인은 어쩐지 기꺼워하며 설명했다.

“저장된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나 말고도 다른 두 명의 선기를 추가인증해야 하거든. 그래서 나도 찍은 뒤에 한 번도 확인해 보지 못했지.”

“두 명?”

“원시천존님과 통천교주이네.”

신공표는 놀랐다. 표정은 딱히 변하지 않았지만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흑점호와 백학동자, 흑학동자가 자신을 주시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당신과 원시천존만이라면 몰라도 어째서 통천교주까지?”

“600년 정도 전에 원시천존님과 통천교주가 각자의 선기를 입력한 물건을 교환하셨다고 하더군. 원시천존님이 받으신 물건이 이것이고.”

“기가 막히네요. 설마 봉신계획용으로?”

옥정진인은 백학동자의 날갯짓 소리를 듣고 진주색 구체를 육각함으로 되돌렸다.

“글쎄, 그것까지는 듣지 못했네. 통천교주는 당신이 받은 것으로 왕혁의 모습을 몇 장 담았다고 하는데 그건 달기가 가지고 사라진 모양이라 찾을 수 없다 하시더군.”

“그거 괜찮은 정보로군요.”

육각함을 다시 받아 챙긴 신공표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만일 그것을 찾아낼 수 있으면 복희를 상대할 때 제법 쓸 만한 거래밑천이 될 지도 모른다. 200년 전의 왕혁은 복희의 기억과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이 사실을 모를 가능성이 컸다. 거기서 신공표는 원시천존이 지나가는 말로 흘린 무형의 대가라는 옹알이를 기억해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이어 또 하나의 가능성에도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굳이 봉래도에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지금이라면 상관없을 텐데요.”

양전이 요선이라는 사실은 물론이고 반요태 모습도 여와와의 최종결전에서 많은 이들이 목격한 바 있다. 핵심적인 부분을 지적당한 옥정진인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더니 그답지 않은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이도 모르는 아이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모의 특권이지.”

신공표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후욱 숨을 들이켰다.

“정말로 생각보다 생각 외의 사람이네요. 새로운 교주님을 키운 스승님은.”

“칭찬으로 듣지. 그래, 기왕이면 이것으로 현재의 양전의 모습을 찍어다 주지 않겠나? 통천교주도 기대하고 계시네. 어차피 한가할 테고, 스토킹 촬영은 당신의 특기이지 않은가.”

“묵과할 수 없군요. 지금 그 말은 비아냥거림입니까? 삼가 사양하·…….”

단칼에 거절하려던 신공표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생각을 고치고 다시 말했다.

“지상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을 찾아내면 한 번 부탁해 보지요.”

최강의 도사는 고양이의 눈을 하고 힐쭉 웃었다.

by 벽효-아리수 | 2010/11/13 00:54 | ├ 작은 기적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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